아버지는 50대 후반부터 70대 후반까지 매년 스페인 성지순례를 20년 가까이 다녀오셨다. 500Km가 훨 넘는 거리를 배낭하나 매고 근 1달간 산티아고로 가는 길바닥을 하루종일 밟아가며 도미토리에 여정을 푸신다. 가끔은 민박을 하며 프랑스 남부를 거쳐 스페인 산티아고 성당에가서 "종이 한장 달랑" 가져 오셨다.
그리고 스페인에 다녀오는 것 이상으로 일본을 다녀오신다. 일본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신다.
아버지는 지금도 고등학교 동문회를 빠지지 않으신다. 1년에 20번 이상 나가시고 내게 어떤 식으로던 알려주신다. 아버지는 34회 나는 64회 경복인이다. 아버지는 본고사를 보고 들어간 세대, 나는 추첨세대의 경복인이다. 그럼에도 경복인에 대한 예와 격을 수십년간 강조하신다. 경복이 어떤 학교인지 선후배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암기가 가능하도록 수십년을 듣고자라왔다.
내가 어렸을 때 제일 듣기 싫었던 아버지 말이 "우리 반 꼴등이 고대 법대 수석했다... 그게 학교냐..."의 라임이었다. 나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레벨의 학교를 무시하는 것이 정말 민망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학벌과 유명세를 종종 이용했다. 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누나, 어머니 , 사돈의 팔촌 등등 필요할 때마다 그들의 배경을 이용해 소소한 이익을 얻고 자라왔다.
나는 찌질한 감정에 휘말려서 이익을 져버리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인생은 암영이 있는 법. 가족 모두가 서로를 객관적 평가하는 사람들이기에 가족으로써 도리를 못한 것들도 많았다. 단지, 내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에 대해 "괴로움", "슬픔", "아쉬움", "불만" 따위가 없을 뿐이다. 나도 내가 그들과 객관적인 평가에서 뒤떨어지는 것을 10대부터 인정하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감정을 제거한 상황판단이 빨라지다보니 "때쓰거나 우기는 짓"은 하지않고 자랐다. 그래서 남들이 억울한 감정으로 집안사를 이야기 할 때마다 "당황"할 때가 많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거야?"
"다른 집들도 비슷비슷할 터인데?"
라는 애매한 스텐스를 마음 속으로 유지했다.
"나와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음악, 미술, 여행을 사랑한다"
아버지, 누나는 백패커의 자세가 된 사람들이다. 누나는 80년대 초반에 혼자서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돈이 떨어지면 남대문에서 구매하고 가져갔던 물건팔며 버텼었다. 누나가 이탈리아 분수대 앞에서 배가고파 비둘기를 잡아먹을 계획을 세웠다는 말은 어린시절 내게 큰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누나가 22살도 안되었을 때이다.
이렇다보니 누나나 아버지나 그들의 준거집단에서 "레전드"로 통했다. 누구나 그들의 이름을 대며 "우리 OO"라는 호칭으로 이너서클로 영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 대신 "음악과 오디오"는 집 안에서 인정받고 자랐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가 수집해오신 수천장의 LP를 듣고 자라왔기에 "취향"과 무관하게 "음원"을 기억하게 되었다.
특히 내 영혼의 반대편 진영에 있는 "Jazz"는 좋고 싫고를 떠나서 내 몸어딘가에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누나의 깐소네, 파두, 샹송까지 듣고 자랐다. 그러나 나는 하드락, 프로그레시브, 헤비메탈, 힙합이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 의도와 다르게 복잡한 음악취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소리를 넓게 듣는(이걸 해상도로 표현하기에는 정성적인 무엇이 존재한다) 내게 본인의 오디오 선택을 의뢰하신다. 새로운 오디오 기기를 구매하실 때마다 반드시 내 의견을 들으시고 구매를 하신다. 내가 20대부터 그러셨으니 벌써 30년은 훨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