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ntage appMaker May 27. 2023

삶을 바라보는 방식

연쇄긍정마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직 두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기적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과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나이가 들면서 세상보는 눈이 넓어졌다. 10대부터 몸 속 가득했던 분노의 열기는 40이 가까워지며 사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보다 잘났어야 했고 누구보다 가진 것이 많았어야 했다. 받아야 할 노력의 댓가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말보다 행동으로 응징하고 살았었다. 그 대상이 누구던간에 댓가를 치루게 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순간 깨달았던 것이 있다. “내가 길가다 맞아죽어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40이 되기 전부터 “사고방식”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4년이 지났다.


...


남들의 삶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생긴 후부터  머리 속에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알게되었다. 내 잘못은 아니더라도 “내 삶에는 언제나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불평등으로 인해 같은 장소에 있어도 서로가 느끼는 공기는 달랐다.

   

식모누나와 친구네 공장의 형들


70년대의 서울에는 왠만한 집이라면 식모누나들이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소녀들에게도 가정집이 안전을 보장해주었을 뿐더러 가정집에서도 육아와 집안 일을 도와줄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식모를 들이는 일은 자연스러운 문화였다. 그렇게 올라온 식모누나들은 그 집 안의 어린동생과 언니오빠들의 허드렛일을 도왔다. 비슷한 나이 때의 청소년이었던 그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신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떤 한을 가지고 살았을 지 상상해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집에서 나를 재워주고 돌봐주었던 누나들도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였을 것이다.



우리가게의 일하는 누나들과 종로에서 만난 껌팔이 여자애


어머니는 종로에 일식집을 수십년간 운영 했었다. 그러다보니 일찍나가셔서 늦게 들어오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이유로 종종 종로까지 걸어가서 어머니와 가게근처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당시 우리가게에서 일했던 누나(내겐 이모에 가까웠다)들도 우리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어쩔 때는 일하는 누나들이 많아서 우리 누나 방에서 같이 자는 경우도 있었는데, 주인집 딸과 같이 자는 심정과 자기 방에 일하는 누나가 지친 몸으로 들어와서 자야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마음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한참 사춘기였던 우리 누나에게는 상처였을 것이고 일하는 누나에게는 진절머리나는 불평등을 느끼는 삶이었을 것이다.

내가 불평등을 느낀 최초의 시점은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종로1가의 유명한 고깃집에서 어머니와 가게식구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 테이블에 하얀색의 드래스를 입은 인형같은 여자애가 와서 껌을 팔려고 했다. 주방장 아저씨가 몇살이냐고 물어보자 나와 동갑이었다. 그 때 나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이상한 분노가 치밀었고 껌하나 더 팔기위해 웃고있는 그 친구를 보기 힘들었다. 그 때가 내 인생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욕을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그 아이의 외모와 환경을 고려해보건데, 상상하기 싫은 험한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명문 서울여상에 간 동네동생


대학교 다닐 즈음 동네에 친한 여자 후배가 있었다. 나이차가 있지만 너무 똑똑해서 언제나 그 친구에게 조언을 듣고 핀잔도 들었었다. 말이 동네오빠지 동네 동생 훈육하듯 말하는 그 친구를 보면서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새로움을 가르쳐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말실수를 했다.

"너는 똑똑한데? 왜 여상가서 그 어린나이에 취업을 했냐?"

물론 서울여상은 우리 때도 탑클래스였다(지금은 서울대 근처에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인왕산 근처 홍재동 언덕에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대학을 가는 것이 대세였다. 그런의미로 말을 했었다. 그러나 전혀 의도하지 않게 그 말이 상처를 주었다. 대학을 가고 싶지않았던 것이 아니라 갈 형편이 못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능력자 개발자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군상의 닝겐들을 만나며 배움을 얻었다. 남들보기 좋은 배경의 사람들이 남의 업적을 채리피킹하며 승승장구하는 것도 많이 보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면 이름없는 능력자 개발자들을 적지않게 만났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만 신경쓰고 말없이 밤을 세우고 남이 해결못한 업무까지 해결하는 수퍼맨같은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사내정치"에는 전혀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일한 것을 아직까지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을 통해 사고를 성장시켰고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IT는 구라쟁이와 노동자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

선과 악으로 구분해선 안된다.
협업을 위해 "대응법"이
다른 것이다. 

IT는 가치를 만들기 위해 "구라쟁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구라가 가치]로 인정받기 위해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깨달음이었다.


지난 삶을 반성할 때마다 남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것을 쟁취하며 살았건만 “분노”와 “욕심”이 가득했었음을 반성한다. 그래서 겸손해지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불평등한 싸움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게 예의는 지켜주고 싶었다. 불평등이었음을 깨달은 후에도 내가 잘했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때가 인생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14년이 지났다.



이 땅을 비혹하게 만든 영웅들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고 체리피커들(정치인, 기업인, 기타 등등)이 날뛰며 그들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진다. 그 때 열심히 노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도 힘들게 살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터전에서 무위도식한 사람들이 “고마움을 모른체” 그들을 경멸하는 것이 느껴져서 불쾌해진다.


스타워즈 영화 중 가장 감동받았던 작품이다. 이름모를 수많은 영웅들이 죽음으로 지켜냈던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장면에서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psw.goodwords


매거진의 이전글 적당함 또는 중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