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긍정마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비트겐슈타인
내 주변에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이 많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일본어 사용자이다. 어머니의 경우 일본(오사카)에서 태어났고 9살까지 일본에 살다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경우는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일본어가 네이티브이다(당시 아이들은 식민교육으로 인해 2개국어를 혼용해 사용했다).
일본여행을 가실 때마다 한국사람임을 알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딕션과 악센트는 분명 그 쪽(일본어) 사람들조차 구분하기 힘들다. 여기서 포인트는 아버지가 일본어를 구사할 때는 사고방식과 행동도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평소 대화했던 아버지와 다른 인격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언어능력을 타고난 것은 아쉽게도 내가 아니다. 우리누나이다. 우리누나는 4개국어를 네이티브로 구사한다. 중학생때부터 그랬다. 주위 어른들과 선생님들이 우리누나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다. 그리고 누나가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미세하게 다른 인격을 경험해야 했었다.
사람들은 다국어 가능한 누군가가 자랑거리였겠지만 어린시절부터 같이 생활한 가족의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았다. “언어가 문화와 다를 때 경험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려면 걸맞는 문화와 사고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종종 발생하는 이슈가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와의 충돌”이었다. 이런 문화충돌은 자라나는 청소년기에는 소극적이거나 공격적인 인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언어와 문화가 다르면 준거집단 사람들과 “사고방식과 소통의 충돌”이 발생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민자 가족의 2세대들이 부모로부터 강요되는 모언어를 사용하며 경험하는 트라우마와 비슷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문제(문화와 언어의 충돌)를 애국심 또는 민족주의라는 말로 포장하며 논하려 하지않는다. 아마도 대부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경험상 다국어 사용에 대한 불편함은 전혀 관심없고 이런 사람이 주위에 있다고 자랑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글과 일상에서도 문화충격이 있다. 종종 글에서 만났던 인격을 기대했지만 오프라인은 전혀 다른 인격을 만나 당황하고 실망하게 된다. 그러나 글에서 접하는 인격과 실제 인격은 다를 수 밖에 없다(유시민의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글쟁이들이 자주 경험하는 이슈라는 반증일 것이다). 글은 생각의 흐름이고 삶은 오감의 진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과 실제 삶과의 차이는 존재하게되고 글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미세하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게된다.
그러나 일상의 언어와 달리 글에서 보여지는 사고방식과 일상의 사고방식이 다르다고 문화충격과 같은 불편함을 경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글은 글이고 일상은 일상일 뿐인 것을 어느정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게임속 캐릭터와 실제 자신을 분리하는 것처럼 글에서 인격은 또다른 아바타로 여겨진다(가끔 과몰입으로 두 개의 영역을 분리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업무가 다양할 수록, 살아온 경력이 다채로울 수록 다양한 [사고방식과 언어]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고방식의 전환은 단어와 언어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이럴경우 선택된 언어가 지금 준거집단에 맞는 것인지만 따지면 된다. 준거집단에 벗어난 사고방식은 충돌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사고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는 언어의 선택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에서는 “개발자” 또는 “기획자”스럽더라도 일상에서는 “태고(太古)” 포스를 풍길 수도 있는 것이다. 글에서 느껴지는 계산적인 인격과 달리 일상에서는 수십년간 “바야바”와 같이 머리보다는 힘이 앞서는 삶을 살아왔다. 이렇게 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글이 바야바고 일상이 계산적이였다면 "문화충돌"을 경험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