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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tage appMaker Dec 14. 2024

올바름을 잊고 살기

일상을 리뷰


틀린 것을 관행이라 일컷는 순간 세상은 비리가 상식이 된다.


“분노하는 날들이 며칠 간 지속되었다”
“건강을 위해서 분노를 조절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게 글은 [업무의 도구]일 뿐, [감정의 해소] 용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글]로 개인화된 정보 또는 감정을 해소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 지금의 분노를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글]은 저자의 [사고방식]을 정리하는 도구이며 그로 인해 잘못된 [사고방식]을 검증 또는 [관리]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올바름을 깨닫기까지


10대에 부마항쟁을 경험했다.


청와대와 경복궁 근처에서 6대째 살던 사대문 주민의 자부심에는 대한민국의 치욕에 입과 눈을 닫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수많은 밀담은 “효자동, 청운동” 근처의 안가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고 뛰어다니며 놀던 그 동네의 이름모를 저택(?)은 “안가(安全家屋)”로 소문나있던 곳이 한두곳이 아니었다. 가끔 그곳에서 젊고 이쁜 여자들이 속옷차림으로 돌아다녔다는 주민들의 입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1970~80년대에는 이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며칠 후, 독재자는 측근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 때를 회상해보면 우리동네의 어른들의 표정은 기대반 두려움 반의 모습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인가? 어떤 세상이 올 것인가? 지금보다 좋아질까? 아니면 더 나빠질 것인가?


그리고 역사는 “나빠짐”을 선택했다.


5공의 추억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 과정은 혼란의 동네주민들에게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린자식(우리세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청와대”쪽에서 야간에 예광탄의 괘적과 함께 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주민 모두가 숨죽이고 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 예광탄을 보며 “불꽃놀이”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친구들과 대화에서 “전장군 그 놈이 나쁜놈이야”라는  말을  무심코 했다가 동네 어른들이 따로 불러 타일렀던 기억이 있다. "그런 말 어디서 들었냐? 그리고 누구한테 들었던 간에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등등의 공포와 호소가 섞인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삶(무거운 공기)은 8년가까이 이어지게 된다.


독재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의 공기가 지금과 다름을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이 내뿜는 공기 속에 [공포]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기 힘들 것이다.  모두가 [감시자]가 되고 대화의 맥락에 [위기와 공포]를 상기시키며 [입단속]을 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발전하지 않고 퇴화된다.


그 당시 기억을 단편적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세상의 공기는 매웠다:
    대학로, 신촌에서 불어오는 최류탄 냄새가 365일 이어졌다.

. 경찰은 군대와 비슷했다:
    동네에 가득한 수방사 군인과 전경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 땡전뉴스:
    지겨울 정도로 찬양으로 가득한 뉴스. 무뇌들만 좋아했다.

. 해외순방:

    전두환이 청와대로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출되었다.    
    배화, 진명, 경복고 출신들은 2주가까이 훈련을 받는다.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성조기.   
    태극할배님들이 우리를 벤치마크 한 것이 맞다고 본다.

. 누나와 형들을 감시:

    동네 모든 부모들이 누나와 형들이 데모하는 지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이나 안기부에 끌려가면 “험한 꼴”을 기본이고
    잘못했다간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 데모, 전경, 동네 형:

    악인과 선인의 구분이 힘들어졌다.     
    데모하던 형들이 어느순간 전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전경다워지고 있었다.  

. 죽음:

    서울대, 경복고 출신 동네형이     
    분신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형을 아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서로에게 물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 전두환 백담사:
    전두환이 백담사로 간다고 발표하는 날
    경복고에 다니는 전두환의 3째 아들은
    같은 반 애들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억에는 별다른 이슈(다른 재벌가 애들에 비해)가 없던
    평범한 아이였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우리 때 대학 구호는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였다.  물태우라고 자신을 호칭해달라고 했던 대통령. 사실 독재국가의 대통령치곤 자기 말대로 “물”에 가까울 정도로 존재감을 보여주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의 친구이긴 했지만, 나름 구테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봤을 때는 “북방외교”가 대한민국의 국력을 키우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문민정부”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3당합당의 야루로 태어난 “민자당”은 아직까지도 배반의 역사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건전한 보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군사독재를 끝내고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시대”의 시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 때 많은 대학생들이 김영삼을 반대와 옹호하는 의견으로 술자리 토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좌우에 대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토론”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독재의 시대(계엄, 구테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갈등인 것이다. 독재는 대화를 멈추고 모든 국민의 생각을 퇴화시켜 버린다.


그것을 이번에 하려고 했던 것이다.


2. 올바름을 증명하기


올바름이 없던 시기(독재)에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작은 악들의 일상”이 문제였다.

비리를 관행이라고 주장하며 “사적이익을 위해 공적이익을 해하는 자”들이 넘치게 된다. 문민정부가 들어오면서 이런 작은 악들의 거센저항을 받게 된다. 관행이라 불렸던 악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공직자 재산등록, 금융실명제)만 하더라도 나라가 망하느니 뭐니 하면서 과격하게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 때보다 수십 배 더 건전하게 성장했다. (문민정부 이전의 매운맛 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상상이 힘들 것이다)


문민정부 이후, 가치관의 차이로 보수와 진보가 갈등을 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건전하게 성장했고 갈등을 처리하는 방법도 나이스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이유는 사회가 “올바름”에 대해 가치를 두고
논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익을 공익으로 둔갑시키면
용서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가치가 독재나 파쇼사회와 비교할 수 없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작금의 미친 짓에 분노하는 것은 “사익”을 위해 “공익”의 뿌리를 송두리체 뽑으려고 했던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기 때문이다.


3. 역사는 반복된다


이번 사건으로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주위에 극우기독에 가까웠던 70, 80대 어르신들의 입에서 “선넘었다”라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단순하다. “독재의 기억”은 잊혀질 수 없다.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삶 자체에 녹아있는 부조리와 압박감이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 2개를 경험했기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독재는 그런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남”이 되는 세상. 이게 독재다. 그리고 계엄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의 궁핍한 변명일 뿐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독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

독재에서 이익을 추구한(할) 사람

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


함익병 선생의 경우, 윤석렬 캠프에도 있던 보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비상식"이라고 분노할 정도로 민주주의의 기본을 그 자가 망쳤다. 이 점을 “작금의 사태를 좌우의 문제”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이슈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간만에 올리는 영상이 이런 영상이라니 참... 계엄령에 대한 함익병의 생각

이 번 사건은 지난 수십년의 세월동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한 사건인 것이다.


저번주의 분노가
오늘 되풀이되지 말기를 빌 뿐이다.
국민은 역사를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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