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빠살이] 행복 찾아 홍천행, 마흔여섯 아빠의 '귀촌 도전기'
서울에서 2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홍천에 도착했다. 용소계곡을 따라 이어진 마을 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자, '메아리 자연농장'이라 쓰인 나무 간판이 보였다. 멀거니 주변을 살피는데, 어떤 이가 둥글둥글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농장 주인 허재승 씨다. 그는 5년 전, 아내와 아이 넷을 데리고 첩첩산중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에 터를 잡았다. 전세금을 털어서 마련한 땅 1만 평에 집도 짓고 농장도 마련했다. 그리고 어느새 가을볕에 단단히 여문 옥수수처럼 찐 농부가 됐다. 꿈을 위해 시골살이를 결단한 마흔여섯 아빠 이야기다.
허재승 씨는 '청소년과 놀이문화 연구소' 간사다. 청소년들이 온전히 성장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20년째 해오고 있다. 농사라곤 작은 텃밭 정도 가꾼 게 전부였던 그가, 마흔 넘어 옥수수를 3000개나 재배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2011년 당시 연구소에서 제안받은 미국 연수가 귀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미국 YMCA에서 운영하는 국제 훈련생 프로그램이 있어요. 보통 단기로 다녀오는데, 저는 1년 반짜리 장기였어요. 드문 경우죠. 당시 연구소 소장님이 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며 추천해 주셨어요. 하지만 저는 그 당시 하고 있던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사실 가고 싶지 않았어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운 기회였다. 가족 모두 동행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훈련생이지만 일하면서 월급도 받을 수 있었다.
"미국 YMCA는 도시에 있지만, 시골에도 부설 캠프가 있어요. 도시에 있는 가족이나 학교 학생들이 시골에 있는 YMCA 캠프장에 와서 며칠씩 자연교육을 받거든요. 연수 기간 동안 아내와 두 딸과 함께 그곳 캠프장에 거주하면서 프로그램 진행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그가 머문 곳은 캠프 피치 YMCA다. 미국 5대 호수로 불리는 이리호(lake Erie)를 끼고 있다. 자연환경은 정말 좋지만, 도시까지 나가려면 차로 30분은 족히 달려야 할 만큼 작은 시골마을이다. 어떻게 보면 본의 아니게 시작한 시골살이였지만, 그때의 경험은 그가 막연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인생의 주제를 실행에 옮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캠프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사실 우리나라 연구소와 비슷했어요. 한 가지 달랐던 부분은 우리 가족이 캠프장 내에서 직접 살았다는 점이죠. 자연환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침에 문을 열 때마다 대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았어요. 그리고 보통 연구소는 교육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찾아가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선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집이자 연구소였어요. 아이들이 집으로 찾아왔죠. 그래서 더 특별했어요. 특히, 그곳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저를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저는 그런 느낌들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귀국하면 꼭 자연이 있는 곳에 땅을 사고 공간을 만들어 제가 경험한 느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미국에서 1년 반을 지낸 후 부푼 꿈을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꿈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난감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남양주 지역의 집값과 땅값이 그 사이에 폭등한 것이다. 꿈이고 뭐고 당장 가족이 들어가 살 집을 구하기 어려웠다. 때마침 연구소에 직원들이 머무는 20평 반지하 공간이 생겼다. 소식을 듣자마자 전세로 들어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급한 불을 끄고 난 후 다시 꿈을 꺼냈다.
"일이라는 게 지속 가능성이 중요한데, 내 집 내 땅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설계한 꿈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남양주는 이미 너무 비싸져서 가진 돈으로는 땅을 살 수 없었어요. 그러다 ‘전세금을 빼면 시골 땅은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땅값이 싸잖아요. 그래서 주말마다 아내와 아이들을 이끌고 싸고 좋은 땅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곳이야' 하는 땅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그러던 2016년 2월에 연구소로부터 운명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두촌면에 연구소와 관련된 교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자연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거주하면서 시설물을 관리할 사람을 찾았어요. 기회였어요. 작게나마 계획했던 것들을 테스트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가겠다고 말했어요."
뜻이 있었기에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가족 모두 교회 게스트 하우스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1년간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귀촌 가능성을 살폈다. 우선 먹고 살 일을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지내보니 두촌면은 옥수수 연구소가 있을 정도로 찰옥수수가 특산물인 곳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옥수수 농사를 시작했다. 동네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성공적인 첫 농사를 지었다. 자연환경 또한 완벽했다.
"몇 가지 기준이 있었어요. 우선 숲, 밭, 물이 함께 있어야 했어요. 그런 곳에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많거든요. 이곳 두촌면의 자연은 아이들에게 힐링을 줘요. 밤에는 조용한 산속에서 별을 볼 수 있고, 산을 휘감아 내려오는 용소계곡은 재미난 놀이터가 됐어요. 이곳에 터를 잡으면 아이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어요."
바로 그가 찾던 곳이었다. 이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숙소 근처에 한 노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마침 땅을 팔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임야까지 포함된 땅 1만 평이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과감하게 전세금을 빼서 덜컥 매매했습니다."
딱 1년 만이었다. 사계절 동안 귀촌을 위해 가능성을 살폈고, 좋은 기회에 이상적인 땅을 매입했다. 부부는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되자 뛸 듯이 기뻤다. 연구소에서도 간사들 각자가 독립적인 전문성을 갖길 바랐다. 농장에서 자연교육을 하겠다는 계획을 듣고 연구소 일과 병행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잇따랐다.
"지인들도 그랬지만, 특히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어요. 남양주도 시골인데 홍천까지 가냐고 하시며, 뭐 먹고 살 거냐?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 거냐?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가 전세금을 빼서까지 밭을 매입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국 연수 때 경험한 자연교육에 한국의 농업을 접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클라이밍을 하고 카누를 타면서도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힐링하고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농업활동을 통해 자연과 만난다면 좀 더 한국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주말마다 가족들이 캠프장에서 주말을 보내면서 다른 가족들과 교류해요. 우리와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히 캠핑이 아니라 교육 공동체처럼 대를 이어 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죠. 맞아요. 미국 문화예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대가족 문화였어요. 지금은 핵가족화가 되어 캠핑 자체가 개인적인 일처럼 되어버렸지만, 분명히 우리도 동네 이웃 어른들과 아이들이 교류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각각의 미국 가정들이 캠프장에서 만나 다 같이 형제가 되는 문화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말만이라도 자연 속에서 형제도 되고 교류도 하는 그런 가족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게 가능한 공간이 필요했고요."
그가 땅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삶의 균형’을 위해서다. 미국 캠프에서 본 것처럼 일터와 삶터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한 곳에서 조화롭게 유지될 때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캠프는 규모가 커요. 300~400명 정도 되거든요. 그래서 연수할 때 일이 너무 바빠서 아이들 이름 불러주기도 힘들었어요. 마치 교육보다 돈이 우선시된 느낌이었어요.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야 했어요. 아내와 몇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우리 가족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를 작게 하고, 펜션이나 임대업을 안 하기로 한 거죠. 아무래도 펜션업을 하게 되면 주말에도 손님들을 위해 서비스를 해야 하니 가정에 신경을 덜 쓰게 될 것 같았어요.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닌 거죠. 그러면 결국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말 거예요. '우리들 각자의 삶과 가족의 일상, 그리고 생업을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꾸려나갈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그는 농부로서 옥수수 농사를 짓고, 교육자로서 아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가장이자 아빠로서 아내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역할을 다하는 건 시골에서 무던히 살아내려 노력하는 거라고 고백했다.
"사실은 농촌에는 일자리가 없어요. 밥벌이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죠. 그래서 저희는 친환경 농장을 운영하면서 교육사업도 하고 있어요. 강소 농장이라고 할까요? 사실, 농사는 짓고 있지만 옥수수는 돈이 안돼요.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꿈이라 계속하고 있어요. 교육은 저나 아내가 평생 해왔던 일이고요. 최근에는 농기구를 발명해서 특허까지 냈어요.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하진 않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운명처럼 찾아온 땅에 옥수수를 심고 그림 같은 두 채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농장을 기반한 자연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메아리 자연농장이 문을 열었다. 첫 번째 집에서는 그의 가족이 생활하고, 두 번째 집은 별채이자 교육관처럼 사용한다. 그가 미국 연수 때부터 그리던 그림이 완성됐다.
"원래는 첫 집만 있었어요. 리모델링을 해서 거주 겸 교육관으로 사용했죠.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불편해했어요. 일터와 삶터의 조화를 위해 '분리'가 필요했어요. 딸아이 방문에 '제한구역' 스티커가 붙어있는 이유죠. 하하!"
그래서 교육관 용도로 두 번째 집을 지었다. 뼈대부터 그가 직접 설계를 했다. 집처럼 편안한 느낌에 주안점을 뒀다. 실내 공간을 가정집처럼 디자인했다. 그래서 강당이 아닌 거실을 만들었다. 집기도 책상이나 의자 대신 좌식 테이블을 놓았다. 마침 이날 두촌 초등학교 학생들이 농장을 찾았다. 허재승 씨의 아내(전다정·42)가 음식을 통해 다문화를 이해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로 프랑스 음식인 카나페와 우리나라 전통 음식인 매작과를 만들어 먹으며 다문화의 차이와 공통점을 배웠다. 1시간여의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마치 자기 집에서 노는 것처럼 교육관 곳곳을 즐겼다. 그가 그렸던 교육관의 모습이다.
실내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나무 클라이밍과 활쏘기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었다. 모두 자연에서 먹거리를 얻는 체험이다. 허재승 씨는 농장 입구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서 몽키 트리 클라이밍(Monkey tree climbing) 수업을 진행했다.
성민아, 다시 한번 해볼래?
엉거주춤 나무를 내려온 아이에게 허재승 씨가 물었다. 이대로 안전장비를 벗는다면 첫 나무 타기 경험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기특하게도 다시 용기를 냈다. 그리고 처음보다 수월하게 홀더 위로 발을 옮겼다. 마지막 홀더에서 아이가 망설이자 허재승 씨가 발 위치를 고쳐줬다. 그의 말대로 오른발을 단단히 디딘 아이는 드디어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올랐다.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내려온 아이의 머리를 허재승 씨가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이날 다시 나무에 오른 성민이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앞으로 살아가며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볼 행복한 추억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허재승 씨가 자연교육을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재승 씨는 2001년부터 5년 동안 가출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맡아서 했다. 보통 아이들이 연구소 캠프장에서 3박 4일 정도 지내게 되는데, 자연 속에서 아이들이 드라마틱하게 변화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가출해서 찜질방 같은 곳에서 지내던 아이들이, 자연 속 캠프로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나게 뛰어놀아요. 밤에는 모닥불 앞에서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요. 그러면 그 짧은 며칠 사이에 아이들의 거칠고 상처받은 마음들이 말랑말랑하게 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는 캠프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간 이들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며 말을 이었다.
"보호관찰 중인 아이였어요. 어느 날 갑작스레 전화가 왔어요. 아이는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을 시도하던 중 제 명함을 우연히 보게 됐고, 캠프에서 먹었던 고구마가 생각이 났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낸 기억들이 떠올랐고, '나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데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에게 전화를 했다고 말했어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는 아이가 거주하는 근처 쉼터에 연락을 해서 비극을 막았다.
"저는 그 일로 사명감을 느꼈어요. 아이들이 캠프에서 지내는 시간은 며칠 안 되지만, 매우 특별한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힘들 때 떠올릴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 된 것이죠. 저는 이 소소한 추억들이 그들의 긴 삶 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현재 그는 중3, 중1, 초2, 6살 아이들의 아빠다. 막내는 귀촌할 당시인 2016년 4월에 태어났다. 홍천 태생이다. 도시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학원을 여러 개 다니는 등 부모들의 교육열에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농장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연 속에서 마냥 뛰어논다. 농사와 교육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했다고 하더라도, 이쯤 되면 아이들 교육 문제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걱정은 교육에 대한 잘못된 관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학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곳에서, 네 남매는 도시의 어떤 아이들보다 건강하고 지혜롭게 자라고 있었다.
"학교에서만 교육이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삶에서 다양한 영역을 경험해봐야 하는데, 도시에서는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패턴이라 그렇지 못하거든요. 저는 학원이나 학교의 울타리 밖에서 경험하는 교육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저희 아이들은 시골살이를 하지만, 도시 아이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빠 일 엄마 일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일이라는 관점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아이들과 함께 계절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 같은 거죠. 자연교육 프로그램도 아이들이 많이 도와줘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해서 그런지, 요즘은 처음 온 선생님들을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하하."
그는 놀이와 일, 그리고 교육을 구분 짓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부모가 일상에서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체험시켜서 스스로 삶의 주제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아빠가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빠의 삶에 아이들이 함께 있다면, 아이들도 삶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거든요. 제가 최근에 농기구를 발명한 과정이 그랬어요. 발명을 해서 특허를 출원하고, 인도로 수출을 시도하는 모습을 곁에서 본 아이들이 벌써부터 자신만의 꿈을 키우고 있어요. 저는 이런 경험을 함께 한 아이들이 어떤 문제를 발견했을 때 직접 부딪혀 풀어내고, 거기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쌓길 바라요. 그러면 농촌에서도 다양한 꿈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시골에서 교육적으로 다양한 경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집이 곧 아빠의 직장이자 놀이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 땅과 내 집을 가지고 내 일을 한다면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처음부터 한 것이다. 그리고 귀촌 5년 동안 그는 농촌에서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아빠로서 증명하고 있었다.
귀촌하기 전, 그는 여느 직장인 아빠처럼 항상 바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정신없이 일하다가 주말에는 피곤에 지쳐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캠프가 두 달 동안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면 일요일에만 집에 들어갔다. 그사이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그는 캠프에서 다른 아이들을 살뜰히 챙기면서 정작 본인의 아이들은 살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귀촌 한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터, 삶터, 놀이터가 하나다 보니까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일을 잘 알게 되더라고요. 덤으로 함께 하는 시간도 많아졌어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의 일상에 참여했고요. 저 또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마흔한 살에 귀촌해서 평생 할 수 있는 주제를 치열하게 찾아가고 있어요. 농업에 교육을 접목했고, 발명을 통해 스타트업 회사를 차렸어요. 앞으로 또 어떤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벌써부터 설렙니다. 저는 농촌에서 찾은 여러 가지 기회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후대에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도 아빠처럼 인생을 걸만한 주제를 여기서 찾길 바라고 있습니다."
인터뷰 중에 원래 꿈이 농부였냐고 물었다. 그는 파일럿을 꿈꿨다고 답했다. 공군사관학교 시험까지 볼 정도로 꿈에 근접했었다고 했다. 시험은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며 아쉬워했다. 붙었다면 지금쯤 홍천 하늘을 날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날개를 접었지만, 해 볼 만큼 해봤기에 후회는 없단다. 시간이 흘러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전 재산을 털어 꿈에 그리던 땅을 사고 가족을 위해 집을 지었다. 가끔 녹록지 않은 대출금이 뼈를 때리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오늘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하늘보다 더 넓은 농장을 가졌기 때문이다.
[알림] 이 글은 베이비뉴스(www.ibabynews.com)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