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관음 Sep 06. 2022

열리는 가슴, 두 번의 불꽃

2012년 여름에 다가서던 어느 날 가슴이 열렸다. 보통 이 말은 은유적 표현이다. 열린 마음으로 들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몸에서 가슴이 열리는 듯한 특이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은유적 표현이지만 이보다 더 나은 묘사는 아직 찾지 못했다.


스승 웨인의 발아래 앉아 가리킴을 따라가던 5년째 되던 어느 날이다. 토요일 아침 웨인의 삿상에 참석했다가 마침 다음 날 일요일에 웨인의 제자였던 스승 발라의 삿상이 있어 참석했다. 아직 생생한 그 느낌,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대담이 오고 갔고 발라는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하면서 친절한 방법으로 내 머리에 경련을 일으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거짓 믿음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 머리가 띵하며 한참 동안 멍했던 느낌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발라와의 삿상 다음 날 월요일 저녁 웨인의 삿상에 다시 참석했다. 이렇게 3일 연속 삿상에 참석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내 명치에서 불타오르던 에너지가 느껴진 지 거의 1주일 되던 날이다.

첫 번째 불꽃,
가슴이 열리다.


이상하게 생전 처음으로 정확히 명치 위치에서 강하게 그리고 뜨겁게 주먹만 한 공이 불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사그라지지 않고 일주일째 계속됐다. 정확히 불탄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불타는 느낌을 가지고 웨인의 삿상에 앉아 있었다. 이날 저녁에는 처음 방문한 여러 젊은 친구들이 웨인과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가슴이 확 열리는 이상하리만치 분명한 느낌을 경험했다. 이야기에 살을 붙이자면 불타던 가슴의 에너지가 해방되면서 가슴이 열렸다고나 할까? 딱히 뭐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분명한 느낌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대담 속 웨인의 말이 가슴에 와 꽂혔다. 바로 그 직전까지 듣는 느낌과 완전히 달랐다. 정말 ‘가슴으로 듣는다’라는 말 그대로, 딱 그랬다. 그전까지는 가슴으로 듣는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굳이 구별하자면 그전까지는 머리로 가르침을 들었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는 가슴으로 듣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논리로 생각하며 들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듣는다고나 할까? 뭔가 가슴에 있던 벽이 사라지고 활짝 열렸다고나 할까? 삿상 중에 웨인에게 이런 느낌을 말했더니 웨인은 5년의 세월이 걸려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됐나 보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가슴이 열린 다음 날 불타는 듯한 느낌은 사라졌다.

가리킴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다.


열린 가슴 때문이었을까? 라메쉬의 책 ‘참의식이 말하다(Consciousness Speaks)’를 읽었을 때 가슴이 반응했다. 어느 구절을 읽을 때면 가슴으로 온몸이 반응했다. 마치 큰 종이 울리듯 온몸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어떤 구절에서는 가슴이 메어왔다.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구절이 있으면 그 부분에 멈춰서 울림이 가실 때까지 머물렀다. 책을 가슴으로 읽는다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영적 서적을 읽을 때 유의할 점은 지식을 얻으려 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빨리 읽을 필요가 없다. 많은 양을 읽을 필요도 없다. 깊이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 꼭 내 경험처럼 에너지로 느낄 필요는 없다. 다만 머리로, 논리로 접근해서는 그냥 누가 이런 말을 했다는 정보 습득밖에 안 된다. 사실, 한 구절이면 족하다. 어떤 이는 로버트 울프의 책 ‘둘이 아닌 참인식 속에서의 영원함(abiding in NONDUAL AWARENESS)’을 읽다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인용한 “찾는 이가 찾아지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확연히 깨우쳤다 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구절 얻어걸리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다시 책장 속에 넣어두는 책이 아니다. 처음부터 읽어나가도 되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마음 가는 곳을 읽어도 된다. 한 구절 가슴에 담고 그 구절이 존재 깊이 스며들 때까지 책을 내려놓고 생활하다 다시 마음이 끌릴 때 다른 구절을 가슴에 담으면 된다. 읽을 때 보다 내려놓고 산책할 때 내려놓고 눈 감고 느낄 때 책은 제 할 일을 한다. 책의 내용은 단지 당신 안에 이미 있는 그 무언가를 일깨울 뿐이다.


가슴이 열린 뒤로는 삿상에서 웨인의 말이 종종 가슴으로 와닿았다. 삿상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뒤늦게 가슴이 울리고 눈물이 흐르던 때가 종종 있었다.

두 번째 불꽃


나는 처음으로 가슴에 일어났던 불타는 느낌을 첫 번째 불꽃이라 부른다. 이 첫 번째 불꽃이 일어나고 5년이 지난 뒤 두 번째 불꽃이 타오른다. 이번에는 머리에서. 느닷없이 “이제는 눈을 뜰 때다.”라는 내면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 정 중앙에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 명치에서 느껴졌던 불타는 느낌과는 달랐지만 아주 강한 집중된 에너지가 머리 정 중앙에서 느껴졌고 가끔은 보통 제3의 눈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에너지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온 기공 명상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앉아서 명상할 때 온몸을 타고 흐르는 강한 에너지, 바라보는 기공 명상을 할 때 온몸을 이끌고 가는 강한 기(氣)의 느낌을 경험하고 스승의 말씀에 가슴이 반응하고 기의 느낌으로 반응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둘이 아니다.


몸과 마음과 영(靈)은 둘이 아니다. 에너지와 기(氣)는 다른 말이 아니다. 또한, 에너지, 기(氣), 몸, 마음, 영, 이 모두는 둘이 아니다. 몸을 수련하는 것이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요, 마음을 닦는 것이 몸을 닦는 것이다. 어떻게 둘일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몸 수행과 마음 수행을 구분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구분은 오직 생각 속에 있을 뿐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언급된 나의 여러 경험과 여기서 말하는 기와 에너지는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몸-마음에 일어난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런 이야기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사람마다 이야기가 다 틀리고 누구의 것이 좋고 말고는 없다.

부디, 뭔가 신비하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내려놓아야 할 짐 하나를 더 얹지 말기 바란다.

-------------------------
이 글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 담으려 썼던 글입니다.



관련 글들:


작가의 이전글 니가 그것 인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