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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May 12. 2024

부처님의 지혜, 최고의 지혜

불교를 믿는 이들은 부처님의 지혜를 최고의 지혜라고 믿는다. 부처가 최고의 지혜를 가진 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 부처의 지혜란 무엇인가? 부처의 지혜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지혜를 뛰어넘어 있다. 인간이나 지구에 국한된 지혜가 아니다. 이 최고의 지혜를 이 작은 글 속에 담을 수는 없지만, 반야심경에 나온 구절을 바탕으로 그 지혜로 나아가는 길의 방향은 살펴볼 수가 있다. 


다음은 책 '반야심경의 비밀'에 나오는 지혜에 관한 구절이다.


부처의 지혜,
無智 亦無得
무지 역무득

지혜란 무엇인가?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다른 이의 이야기다. 그렇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직접 체험하면 우리는 보통 이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혜라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지혜가 '진리'라는 말과 엮이면 뭔가 대단한 지혜가 있을 것만 같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나 노자나 예수 같은 분들을 절대적 지혜를 가진 분으로 숭배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절대적인 지혜가 있을까?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을까? ‘내’가 얻어서 깨달아 ‘고집멸도’할 수 있는 절대 지혜가 있을까? 이런 의문은 지혜의 본질을 살펴보면 자연히 사라진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지혜라는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라. 어찌 보면 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같은 생각으로 결과가 좋으면 지혜가 되지만 결과가 나빴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우둔함이 된다. 같은 순간에도 누군가가 지혜라고 여기는 것을 누군가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세상의 지혜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를 살펴보라. 절대적인 지혜라고 할 것이 있는가? 늘 변하지 않는 지혜가 있는가? 세상 모든 이가 동시에 지혜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싶은 것'과 ‘있는 그대로 절대적인 것’은 다르다. 우리가 믿는 지혜라는 것들이 가만히 보면, 그 또한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다.


이런 '지혜'의 본질을 바로 보면 ‘무지 역무득’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왜 지혜가 따로 없다고 말하는지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공한데 지혜라고 예외일까.


반야는 하나의 가리킴이다.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모든 믿음을 내려놓을 때, 모든 지혜의 공함을 바로 볼 때 드러나는 무엇이다. 이 사실을 바로 이해해야 가리킴의 본질이 드러난다. 반야심경이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 찾음의 본질을 바로 알 수 있다. 왜 스승들이 찾음의 길이 얻는 과정이 아니라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얻을 지혜가 없기에 얻을 진리도 없다. 이미 쌓여 있는 수많은 편견과 오해를 덜어내고 덜어내면 늘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본질을 바로 보면 의문이 없다.
모든 의문이 사라지면 그때가 찾음의 끝이다.
더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
'무지 역무득'이다.


無智 亦無得

무지 역무득


스승은 다시 한번 말한다. 지혜가 따로 없기에 '당신'이 얻을 지혜란 없다고.

지혜는 있다. 반야는 있다. 진리는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있다. 다만,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따로 없다. "얻어서 당신 가슴속에 숨겨둔 목표에 써먹을 지혜는 없다."라고 스승은 분명히 말한다.

반야심경은 반야라는 지혜를 가리킨다. 궁극의 지혜인 ‘마하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지혜가 따로 없다고 하지?"라고 의아할 수 있다. 물론 지혜는 있다. 하지만 궁극의 지혜 반야는 당신이 머리로 이해하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지혜가 아니다. 이 때문에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진리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은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얻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니다. 진리는 세상 모든 대상을 포함한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존재 자체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핵심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혜가 따로 없는데 어디 얻을 지혜가 있을까. 석가모니는 당신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반야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무엇을 가리킬 뿐이다. 당신이 직접 눈을 뜨고 보도록.

'무엇’을 찾는 한, 찾음은 끝나지 않는다. 찾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면 찾아져도 그 대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찾아졌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대상이 한정되고 그 무엇이 어떠할 거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으면 찾아지는 것은 그 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날 수 없다. 찾고자 하는 무엇은 사실, 이미 여기 지금 있다.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찾음은 허상이다. 이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찾음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그저 찾음이다.' 글에서 가져옴.

책 전체를 읽지 않고 위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또, 옳고 그른 것에 관한 편견이 있으면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여기에 도움 될 만한 내용을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가져와 봤다.


누가 좋다, 나쁘다 하는가?


사람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말한다. 옳고 그름을 말한다. 저것은 거짓이고 이것은 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좋은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쁘다. 옳은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르다. 내가 옳다고 여기고 행동했는데 누군가는 상처받는다. 이런 경우를 살아가면서 늘 마주친다. 도대체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한때 확신했던 가치에 의문이 일어난다. 무엇을 오해했을까? 숨겨진 진실이 뭘까?


선과 악은 있다. 옳고 그름은 있다. 좋고 싫음은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있다. 착함과 나쁨은 있다. 위대함과 하찮음은 있다. 군자와 소인은 있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은 있다. 강함과 약함은 있다. 적절함과 부적절함은 있다. 완전함과 불완전함은 있다. 기쁨과 슬픔은 있다. 행운과 불행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특정한 순간,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존재한다.


가치는 오직 바라보는 시점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한 사람이 좋다 하면 다른 사람은 싫다 한다. 한 사람이 아름답다 하면 다른 사람은 추하다 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위대하다 하는데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경멸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선이라고 하는데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악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인간 외의 다른 모든 생명에게는 나쁜 일이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보는 시점이 있어야만 가치가 존재한다. 다른 말로, 보는 시점이 없으면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는 변한다. 선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악하고, 악한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선하다. 강했던 사람이 약해지고 약했던 사람이 강해진다. 군자였던 사람이 소인이 되고, 소인이었던 사람이 군자가 된다. 싫었던 사람이 좋아진다. 좋았던 일이 싫어진다. 약한지 알았는데 강하다. 강한지 알았는데 약하다.

같은 사람의 시각도 시간에 따라 변하며 같은 대상에서 다른 가치를 본다. 대상도 보는 사람도 그대로인데 주변 환경이 바뀌면서 가치가 변한다. 어디에도 고정된 가치를 찾아볼 수 없다.

가치는 오직 바라보는 이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상대적 세상이다. 상대적 세상 안의 모든 것은 세상을 보는 당신의 시점에 따라 정해진다. 대상은 아무 말이 없다. 가치는 대상에 있지 않기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원래부터 선하고 악한 것은 없다. 원래부터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대상에는 위대함이나 하찮음이 없다. 대상은 원래부터 쓸모 있거나 쓸모없지 않다. 대상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가치는 가치를 정하는 이가 창조한다. 그리고 가치를 정하는 이가 없으면 가치도 없다. 이 사실을 깊이 바로 보면 세상을 볼 때 일어나는 오해와 혼란이 크게 해소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체와 객체가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상대적 세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길을 열어준다.


새옹지마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자성어인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새옹지마는 변방 늙은이의 말이라는 뜻으로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 나라 간에 전쟁이 빈번하던 시절, 북쪽 변방 작은 마을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고 기르는 말이 한 필 있었다. 하루는 기르던 말이 달아나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참 나쁜 일이네. 큰 재산이 사라져서 어쩐다. 참 불행한 일이야.” 하지만 노인은 “불행인지 아닌지 두고 봐야죠”라고 덤덤히 답한다. 며칠 뒤에 도망갔던 말은 다른 야생마 한 마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축하의 말을 건넨다. “어쩐 일이래? 그 비싼 말이 한 마리 공짜로 생겼구려. 참 좋겠어. 잃은 줄 알았던 말도 찾고. 참 행운이네! 축하해요.” 하지만 노인은 “행운인지 아닌지 두고 봐야죠”라고 덤덤히 말한다. 그런데 아들이 새로 온 야생마를 길들이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할 처지가 됐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위로한다. “아이고, 이를 어째! 그 말이 액운이었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큰일이네. 아직 혼인도 안 했는데 혼처 생기기도 힘들겠어. 재앙도 이런 재앙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재앙인지 아닌지 두고 봐야죠”라고 덤덤히 말한다. 얼마 뒤, 전쟁 중이던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몸이 성한 남자들을 전쟁터로 다 끌고 가버렸다. 마을에 있던 젊고 성한 사람들은 다 끌려갔지만, 노인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 덕에 끌려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와서 하소연한다. “아이고, 우리 아들은 끌려가서 이를 어째. 끌려가서 살아온 사람이 없다던데. 이 집은 참 다행이네. 다행이야.”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덤덤히 듣고 있었다.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인생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보면 새옹지마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좋은지 알았던 일이 다음 순간 좋지 않은 일이 된다. 또 뒤바뀌는 일이 빈번하다. 좋고 나쁨이 상황이 변하면서 바뀐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느 순간 불행이 닥치면 마치 불행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불행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몇 배 더 힘들어한다. 닥친 불행보다 우리는 이 생각 때문에 더 힘들다. 더 두렵다.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으로 고통받는다. 하지만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변하든, 바라보는 나의 시점이 변하든, 어떻게든 불행은 사라진다. 슬픔은 사라진다. 힘든 고통은 사라진다. 싫은 일도 지나간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권의 수피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این نیز بگذرد)”라고 말한다.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이 또한 지나가게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 또한, 지나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지나갈 일이니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너무 기뻐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기쁘고 슬픈데 어쩌랴?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알고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일어나도 괜한 걱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괴롭지는 않다. 하여튼,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여기까지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좋고 나쁨의 교훈이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면서 좋고 나쁨이 바뀐다는 사실은 살펴봤다. 그럼, 그때 그 순간에는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고 또 다음 순간에는 절대적으로 나쁜 일이었을까? 누가 뭐래도 고정된 좋고 나쁨이 있을까? 새옹지마 이야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각색해서 이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말이 한 마리 더 생긴 것이 정말 좋은 일이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의 다음 부분은 생각하지 말고 이 시점에서만 살펴보자. 도대체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축하를 전하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분명 노인에게 좋은 일로 비쳤다. 동네 사람들이 생각할 때 노인의 가족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일지는 모른다. 축하를 전하는 동네 사람일지라도 속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노인과 관계 좋고 친분 있는 사람에게는 기분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몇몇 동네 사람들은 샘이 나서 잠을 설친다면 이들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럼 정작 노인 가족에게는 좋은 일일까? 노인은 덤덤하다. 겉으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밖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다. 원래 이야기에는 안 나오지만, 노인의 아내는 살림살이가 나아지겠다 싶어 한동안 기분 좋은 나날을 보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노인 부부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같은 가족이라고 아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아들은 부모가 기뻐하니 같이 좋아하며 좋은 일로 여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까지 말 한 마리 관리하는 것도 힘들어 불평이 많았다면 한 마리가 더 생기는 일은 악몽일 것이다.


아들이 다리를 다쳐서 군대에 끌려가지 않은 일이 좋은 일이었을까? 도대체 누구에게? 노부부와 마을 모든 사람은 다행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을까? 만일 아들이 야생마를 서슴지 않고 길들일 만큼 승마에 뛰어나고 활을 잘 쏘며 무술에 능해서 늘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출세하는 꿈을 꾸었지만, 다친 다리 때문에 꿈을 이룰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면 어땠을까? 마을 어르신들이야 자식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겠지만 젊은 청년들은 나가서 출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꿈을 키워왔을지 모른다. 아들은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마을에 온 군인에게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을지 모른다. 잘 걷지는 못하지만 병법을 많이 연구해서 도움이 될 거라고 부디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을지 모른다. 만일 노부부와 마을 사람들이 못 가게 막아서 꿈이 좌절됐다면 아들에게는 몹시 나쁜 일이다.


전쟁터로 끌려간 남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이 일이 나쁜 일이기만 할까? 대부분 마을 청년들은 평화롭게 살던 터전에서 그대로 살고 싶었을 테고 그들에게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몹시 나쁜 일일 수도 있다. 그들의 부모도 마찮가지다. 아들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나쁜 일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군인의 꿈을 꾸고 있었을 누군가나 작은 마을을 떠나고 싶었던 누군가에게는 그 순간 꿈을 꾸게 되는 좋은 일일 것이다. 끌려가는 한 청년에게 늘 학대당하던 여자가 있었다면, 그녀에게는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신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는 좋은 일일 것이다.


이렇게 한 가지 일은 얽혀있는 각자의 시점에 따라서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한다. 일어나는 일 그 자체에는 좋음과 나쁨이 없다. 선과 악이 없다. 위대함이나 하찮음이 없다. 가치는 보는 이의 관점에서 결정된다.


선과 악은 있다. 내가 보기에 좋고 내가 보기에 나쁜 것이 있다. 우리는 내 생각이 여러 사람에게 공감받기 원한다. 급하면 ‘신에게 맹세하건대’라며 나의 시점을 믿어달라 애원한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다. 공감받고 싶다. 나의 시점을 지지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좋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본성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왜냐하면, 모두는 오직 자기 시점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면, 세상은 오직 나의 시점으로만 존재한다. 다른 사람의 시점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시점을 받아들이는 나의 시점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해는 가지만 선뜻 그렇다고 수긍 못할 수도 있다. 그럼 지금부터 한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자기 시점을 공감받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고 전혀 문제가 없지만, 공감받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서 이 시점을 보편적인 시점으로 잘못 믿으면 문제가 된다. 자기의 선이 진정한 선이라고, 보편적 선이라고 말한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마음이 닫힌 사람일수록 더 밀어붙인다. 많은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고자 자기가 믿는 가치를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 포장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 정당성을 부여할 가장 강한 후원자를 끌어들인다. “이것이 절대 선이다. 이것이 신의 뜻이다. 저것은 절대 악이다. 신이 벌하는 악이다”라고 말하며 신을 등에 업는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인가?


상대적인 세상에 보편적 가치가, 절대적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현실을 잘 살펴보라, 보편적 가치가 있을 수 있는지. 절대 선과 악이 있을 수 있는지. 내가 믿고 싶은 것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같지 않을 수 있다. 같지 않으면 믿음은 거짓이다. 그저 환상일 뿐이다. 찾음은 환상을 바로 보고 거짓 믿음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내 믿음과 상관없이 진실을 찾는 과정이다. 지금껏 살펴본 내용을 가지고 스스로 잘 살펴보라. 거짓 믿음을 내려놓으면 이해는 자연히 일어난다.


어떤 때는 상황적 변수가 없는데도, 좋고 나쁘고, 쓸모 있고 쓸모없음이 계속 바뀐다. 마음속에서 말이다. 지나가다 가방이 좋아 보여서 비싸지만 혹해서 샀다. 처음에는 아주 좋았다. 정말 쓸모 있고 가치가 크다고 스스로 설득해서 샀는데 자꾸 마음이 변한다. 좋았다 안 좋았다, 그만한 값의 가치가 있다 없다, 잘한 일이다 잘못한 일이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생각이 요동친다. 한 친구가 정말 잘 샀다며 한정판이라고 부러워한다. 너무 잘한 일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그런데 평소 꼴 보기 싫던 친구가 더 좋은 가방을 들고나와서 “그거 한물갔어. 이게 진짜 신상이야. 속았구나?”라고 염장지른다. 기분이 상하고 괜히 샀다는 생각에 가방이 꼴도 보기 싫다. 좋고 나쁨은 생각 속에 있기에 늘 변한다. 나의 좋고 나쁨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정한 가치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 생명처럼, 신념처럼 지켜온 가치들, 가끔 “정말 이것이 진리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혹시 내가 정한 가치가 변하지 않아야 하고 최소한 나에게는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이 순간 내가 보는 가치는 있지만 나에게조차 변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가 있을까? 이것이 가능이나 할까? 이 상대적인 세상에서.


새옹지마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자. 이야기 속 노인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세상의 이치를 잘 알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대단한 군자(君子)처럼 보인다. 반면, 일희일비하는 동네 사람들은 이 노인에게 배워야 할 소인배(小人輩)처럼 보인다. 이런 군자와 소인배라는 가치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심리 전문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 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노인을 한번 바라보자. 만일 노인이 평소 배워온 군자의 덕을 실천하려 자기 성격과 다르게 행동했었다면 어떨까? 말이 야생마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기뻤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아들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평정심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늘 속앓이가 엄청나다. 옆에 있던 부인이 “좋으면 좋다 하고, 싫으면 좀 싫다 하면서 내색도 하고 살아야지. 사람이 그러면 병나요! 속병이 얼마나 무서운데”라고 늘 잔소리다. 원래 노인은 밖으로 기분을 드러내는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군자의 도를 따르고자 성격을 억누르고 살다 보니 스트레스로 늘 소화가 잘 안 되고 잘 먹지 못한다. 그리고 말년에 부인 말처럼 속병을 힘들게 앓다가 고생하며 세상을 떠났다. 만일 이러했다면, 성격대로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면서 후련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노인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미련한 사람이다. 차라리 마을 사람들이 자기 성격에 맞게 허례허식 없이 잘 산 사람이다. 반면, 노인이 가치를 둔 군자의 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노인을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할지 모른다.


우리에게 악처로 익숙한 소크라테스의 아내를 보자. 나쁜 아내의 대명사처럼 알려졌지만 요즘 여성 인권과 가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소크라테스의 아내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돈도 못 벌고 매일 밖에서 수다나 떨러 다니며 집안일은 도와주지도 않고 또 거기다, 가족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신념 지킨답시고 독배를 마시고 죽어버렸다. 대단한 성인으로 칭송되는 소크라테스가 당신의 남편, 당신의 아들이 된다면 좋겠는가? 소크라테스는 수천 년 동안 이름을 오래 남기지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이름이고 철학인가? 분명 그 가족은 아닐 것이다. 대단한 철학자로 많은 사람에게 훌륭하게 보이지만 가족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누가 그 가족에게 보편적 이로움을 위해 희생하라고 주장하며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누가 보는 이로움이며 누가 보는 정당성일까? 누가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보편적이라고, 절대적이라고 포장하지만,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 쪽의 관점일 수밖에 없다.


가치를 말할 때, 잘 생각해 보라.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가치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가? 누구에게 가치가 있는가? 절대적 가치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아니다. 이 책에서 하는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내 경험으로 직접 살펴서 깨우쳐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 그 민낯이 어떤지 직접 보라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십계(The Ten Commandments, 1956)라는 영화를 아주 인상적으로 봤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 장면이었다. 오랜 세월 지배층의 핍박 속에 노예 생활을 해온 자기 민족 사람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나오다 홍해를 만나 멈춰 서 있는데, 뒤에서 이집트 군대가 쫓아온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다를 가르고 자기 사람들을 모두 무사히 건너게 한 뒤 갈라진 바다를 닫아 좇아오는 이집트 군대를 바닷속에 수장시킨다. 자기 사람들은 구하고 나쁜 이집트 사람들은 혼내주는 장면이었다. 종교적 내용이나 논쟁을 떠나서 이 장면이 가슴에 남아서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물속에서 죽어간 이집트 병사들이 가슴에 걸렸다. 아무리 하나님이고 또 모세의 이스라엘 민족 사람들이 박해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박해했던 주범인 이집트의 지배 세력들만 벼락 맞아 죽었으면 이해 되는데 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정작 죽은 이들은 선봉에 내몰려 따라가야 했던 이집트의 병사들이었다. 영화에서는 당연히 죽어도 되는 나쁜 이들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단지 지어낸 이야기였으면 영화의 극적 효과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서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일이었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편적 선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절대자가 행한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그것이 보편적 선이며 정당한 일인지,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많은 병사는 다들 바다에 수장시켜도 당연할 만큼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이해가 안 됐다. 병사들 가운데는 분명, 적은 봉급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 있을테고, 가난한 집에서 착하게 자라다 어쩔 수 없이 군대에 들어가서 제대할 날만을 기다리던 착한 병사들도 많지 않았을까? 정치적 상황은 고사하고 정확히 누구를 쫓는지도 모르는 병사도 있지 않았을까?


물이 불어날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폐에 물이 차면서 무서움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 했던 병사들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죽은 병사들의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도대체 무슨 죄로 평생을 아들 잃은 한을 가슴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을까? 누가 이들의 죽음과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같은 일이 한 무리에게는 신의 축복일 수도 있고 다른 무리에게는 내 아들의 생명을 앗아간 몸서리쳐지게 악한 불행일 수도 있다. 도대체 누가 그들의 희생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그 일을 보편적 선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강요받는 상황을 종종 만난다. 교육을 통해서, 각종 매체를 통해서,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보편적 가치를 주입받는다. 오랜 세월 주입된 보편적 가치를 주입된 가치인지 내가 생각한 가치인지 구분 없이 사실처럼 믿는다. 믿음은 사실이 되고 진리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살아오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서 보편적 가치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가치에 관한 갈등이 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를 떠나서, 나 자신도 내 의견과 나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포장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어딘가 편치 않았다.


우리는 인간이고 몸이 둘이 아니기에 한쪽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자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좋고 싫고, 선하고 악하고, 옳고 그르며, 위대하고 초라하기를 나눈다.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살아가려면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가치 판단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기능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에서 경쟁에 이기려 자기 의견을 보편적 가치로 포장한다.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내고 싶다. 정치인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처럼 포장한다. 국가는 추진하는 정책이 보편적 가치인 것처럼 선전한다. 사회는 특정한 규범이, 특정한 문화가 보편적 가치인 것처럼 교육하고 주입한다. 종교는 자기들의 교리가 보편적이고 절대적 가치인 것처럼 세상에 전파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믿으려 한다. 집단이 정한 보편적 가치에 반기를 들면 가혹한 시련이 따른다. 집단의 가치는 집단 그 자체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집단은 생존을 위해 보편적 가치를 만들고 지켜야 한다. 집단 그 나름대로 생존의 법칙이다.


우리는 이야기할 때 재미있게 하려 애쓴다. 우리 편은 절대 선인 것처럼 포장하고 상대편은 절대 악인 것처럼 포장해야 재미있다. 절대 선이나 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동조할만한 정당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또, 조금은 과장하고 부풀려야 재미있기에 늘 한쪽의 가치를 강조하게 마련이다. 이런 일은 늘 일어난다. 나 자신도 이야기할 때 부풀리고 한쪽 가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자주 발견한다. 의사소통서 늘 일어나는 일이고 방송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일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한쪽의 가치가 절대적인 양 착각하고 세뇌되기 쉽다. 많은 사람이 동조하면 자신도 그렇게 믿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 가슴속 깊숙이 의문이 일어난다. “정말 사실일까?”, “특정한 가치가 그 대상에게 있을까?”, “그 대상이 원래 선하고 원래 악한가?”, “어떤 일은 늘 좋은 일이고 어떤 일은 누가 봐도 나쁜 일일까?” 지극히 당연하게 그렇게 믿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이런 의문들을 가만히 살펴보라. 대다수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대상에 가치가 있다고 믿고, 또 이것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보려 한다면 이 의문들을 살펴봐야 한다.


당장은 동전의 앞면만 보이더라도 분명히 동전의 뒷면은 있기 마련이다. 동전이 커서 뒷면을 볼 수 없다면 뒤로 좀 물러나서 잘 살펴보라. 너무 가까이서 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충분히 뒤로 물러서서 찬찬히 살펴보라. 동전이 한 면밖에 없는지, 뒷면은 존재하지도 않는지. 한 면만 존재하는 동전이 있을 수나 있는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인지. 한쪽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 가치에 집착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다. 사실과 바람은 다르다.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할 때 모든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고자 할 뿐이다.


자기 가치만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믿고 그렇게 포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일은 늘 있다. 다른 이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자기 가치를 강요하는 일은 힘의 논리를 적용하는 일밖에 안 된다. 힘의 논리에 따른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보편적 가치를 고집하는 일은 상대적인 세상을 부정하는 일이다. 동전의 뒷면을 부정하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는 일이다. 보편적 가치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슬픔 없이 기쁨만 존재하는 세상은 당신의 상상 속에만 있다. 악 없이 선만 존재하는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모두에게 좋은 것만 존재하거나 나쁜 것만 존재하는 세상은 오직 믿음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보편적이라고 여기는 가치라도 상대적인 이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순간 곧바로 상대적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상대적 가치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믿더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순간 상대적인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우주에서 동전은 두 면을 가진다. 한 면만 있다고 아무리 떠들어 대봐야 다른 한 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 면을 만들면 다른 한 면은 늘 따라오기 마련이다.


지금까지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살펴봤다. 우리가 인간이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인간만 살지 않는다. 조금만 더 들어가서 새옹지마 이야기를 살펴보자. 따라온 야생마는 마음에 드는 친구를 그냥 따라왔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말 한 마리가 더 생겨서 좋다고 하는데, 이 야생마는 사람 손이 닿는 순간 자유의 몸에서 노예의 몸이 됐다. 고삐를 채우고 안장을 얹고 인간이 자기 뜻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채찍질까지 한다. 같은 일이지만 말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자신을 노예 삼아, 아니 노예보다 못한 물건 취급하면서 자기 것인 양 행세한다. 도대체 누가 있어 이것을 정당화하는가? 오직 인간이 인간의 관점에서 ‘정당하다’ 외칠 뿐이다. 힘의 논리다. 말은 힘의 논리에 따라 고통받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지금 글을 쓰는 나도 글을 읽는 당신도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에서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부터 인간의 관점에서 존재하느냐는 완전 별개의 문제다. 세상은 인간이 있든 없든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바라보는 시점이 맞다고, 보편적이라고, 절대적이라고, 기준이 돼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인간이 자기 관점에서 떠들어댈 뿐이다.


1300년대 유럽에는 흑사병이 돌아 인구의 반이 죽어 나갔다. 이런 일은 인간이면 누가 봐도 나쁜 일이다. 엄청난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막 죽어 나갔다. 어떤 전쟁의 상처보다 컸다. 유럽 어딜 가나 마을 사람들 둘 중 하나가 죽는데 세상이 온전했을까? 살아남은 사람들도 트라우마가 엄청났을 것이다. 인류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보편적으로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명 인간에게는 재앙이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나쁜 일이다. 하지만 시체를 먹고 사는 청소 동물이나 곤충들, 미생물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풍족한 먹이가 생기고 개체 수를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주는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 우주에서 사람 숫자는 지극히 적고 이들의 관점은 거의 없다시피 미미하다. 우주 안에서 지구는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지구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지구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떨까? 인간은 자기들이 지구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지배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지배한다는 말에는 소유의 개념과 분리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지구와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서 지구를 소유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것이 맞는 개념인가? 최고의 포식자를 넘어서서 파괴할 힘까지 있으면 지배하는 것일까? 최고의 포식자 순위도 인간의 관점에서 매긴 순위지 박테리아의 관점에서는 다르지 않을까?


아직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뭔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져버릴 수 없다면, 잘 살펴보라. 당신은 한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하기에 하나의 시점을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나면서 나만의 고유한 시점이 생겨났다. 상대적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시점에서 보는 가치가 매 순간 결정된다. 살아 있기에 늘 좋고 나쁨이 있다.


찾음이 끝난 자연인도 사람이기에 인간의 모든 상대적 가치를 구별한다. 살아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듯, 깨달았다고 좋고 나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극복할 문제가 아니다. 당연한 인간의 본질이며 상대적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본질이다. 자연인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다. 당신과 다를 바 하나 없다. 다만, 자연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안다. 그래서 자기가 말하는 선과 악이, 좋고 나쁨이 자기 시각에서 보는 상대적 가치임을 정확히 안다.


스승은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다”라고 말한다. 가치는 시점에 있지 대상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보편적 가치는 없다는 말이다. 자신의 한 시점을 벗어나서 세상 전체를 전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 그 자체에는 어떤 가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좋음도 나쁨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러 시점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혹, 진리를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가치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리는 가치가 아니다. 가치는 필연적으로 시점에 따라 일어나기에 상대적이다. 상대적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반면 진리는 절대적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무엇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아무리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정의해도 상대적인 세상에서 ‘진리’를 생각하고 말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상대적이 된다. 그래서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당신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상대적 세상 너머의 무엇이다. 찾는 이는 이 무엇을 찾고자 한다. 찾는 이를 위해 스승은 이 무엇을 ‘진리’라는 개념으로 가리킨다.

나의 지혜를 고집하는 한
부처의 지혜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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