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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음 Jun 23. 2024

붓다 - 부처, 불(佛), 삼세제불

잘 아는 친척 형이 스님이 되었다. 좀 깊이 이야기해 볼까 대화를 시작하는데, 시작부터 큰 벽에 부딪힌다.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제일가는 부처요, 다른 모든 부처들 위에 있는 최고의 스승이라는 믿음이 너무도 확고했다. 

스님은 찾는 이가 아니라 종교인이었다. 난 종교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용히 듣고 말았다.


부처가 뭘까? 부처에 서열이 있을까? 높고 낮음이 있을까? 왜 석가모니만 유일하거나 최고의 스승이어야 할까? 


불교는 석가모니를 신격화한다. 특별하게 만든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불교를 만들지 않았다. 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전하는 부처의 뜻을 이전 책에서 살펴 옮긴다.


三世諸佛

삼세제불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á, बुद्ध)’에서 온 말로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말로 부처라고 한다. 대표적인 붓다는 석가모니라 불리는 ‘고오타마 싯다르타’ 붓다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대표적인 부처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부처는 아니다. 반야심경이 가리키는 진리에 눈을 뜬 모든 이가 부처다. 반야심경이 가리키는 진리는 ‘마하반야바라밀다’이다. 특별한 진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리다. 그러니 반야는 오랜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인도든 동양이든 서양이든, 심지어 은하계 저 너머 행성이든, 어떤 세계이든 다를 수가 없다. 이런 반야에 눈을 뜬 모든 이가 부처다. 


‘삼세제불’은 이런 모든 부처를 가리킨다. 석가모니만 특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석가모니를 숭배하는 종교인은 이 해석에 큰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계급을 나누고 서열을 세워서 숭배하는 ‘가치’는 오직 숭배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있다. ‘시제법공상’하기에 ‘불구부정’이라고 반야심경은 분명히 말한다. 모든 가치는 공하다. 석가모니라고 다르지 않다. 석가모니를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함이 석가모니라는 대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알면 그만이다.


특정 인물이 특별하다는 ‘전도몽상’에서 벗어나야 스승이 가리키는 바를 오해하지 않는다. 특정 스승을 특별하게 만들고 숭배하는 마음 뒤에는 ‘내’가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바람이 숨어있다. 무언가 얻을 것이 있기에 특별한 방법이 있어야 하고 특별한 방법을 알려줄 특별한 스승이 필요하다. 얻고자 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스승은 더욱더 대단해져야 한다. 모두가 숭배할 만큼 위대한 신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것을 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이런 믿음에서 벗어나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일깨운다.


자연인


‘자연인’이라 하고 ‘보통 사람’과 구별한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 사람을 ‘자연인’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 부른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났다고 다 가르침을 전하진 않는다. 가르침을 전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가 스승이라고 여겨야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찾음이 끝났다고 다 스승은 아니기에 찾음이 끝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필요했는데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라는 말이 정확히 그렇지만 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고 그 말에 입혀진 편견이 너무 두꺼워 쓰기 부담스럽다.


스승 라메쉬는 영어로 세이지(Sage)라는 말을 주로 썼는데 라메쉬의 책 ‘참의식이 말하다’를 번역하면서 ‘현자(賢者, sage)’라는 말로 번역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현자라는 말이 마땅치 않았다. 현자는 현명한 지혜를 가진 사람을 말하는데, 이 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를 뜻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는 결국 다 상대적인 가치다. 또 어떤 집단에서는 성자에 다음가는 사람으로 계급을 매길 때 현자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많은 책에서 ‘성자(聖子)’나 ‘성인(聖人)’이라는 말을 종종 쓰는데 이 말은 어떤 특정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행동 양상을 따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찾음과 전혀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오해가 참 많은 말 가운데 하나라 쓸 수가 없다.


마땅한 이름이 없어 찾다가 스승 리사 카하레가 주로 쓰던 ‘자연인’과 ‘보통 사람’이라는 말을 써보기로 했다. 자연인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내가 받아들인다’라는 믿음이 없기에 단순히 있는 그대로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다. 자연인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보통 사람과 자연인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보통 사람이 “아, 원래부터 난 자연인일 수밖에 없구나”라고 아는 순간 자연인이다.


궁극적 깨달음은 찾음이 끝나는 일이다. 궁극적 깨달음을 때로는 ‘해탈’이라고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도 하고, ‘신과 하나가 된다’고도 하고, ‘에고가 사라진다’고도 하고, ‘내가 없어진다’고도 한다. 오랜 세월 쌓여온 수많은 믿음들 때문에 여기에 뭔가 대단하고 엄청나고 신비한 무언가가 있는지 착각한다. 궁극적 깨달음은 사실 별것 아니다. 딱히 말할 것도 없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 자연인들이 만나면 여기에 관해 따로 할 말이 없다. 특별할 것 하나 없다. 궁극적 깨달음은 그저 ‘찾음이 끝나는 일’이다. 우리는 다들 어쩌다 찾기 시작한다. 뭔지 모르지만 찾는다. 진리를 찾고 나를 찾고 자유를 찾고 이상 세계를 찾고 내면의 평화를 찾고 하나님 나라를 찾고 도를 찾고 성불을 찾고 해탈을 찾는다. 이런 찾음이 끝나는 일을 그냥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한다. 다만, 무엇을 찾든 찾아지는 무엇은 당신이 예상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얻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남아 있기에 자연인이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자연인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가 되는 까닭은 있는 그대로를 거부하는 독립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는 ‘내’가 정한 틀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에는 틀이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있는 그대로다. 자연스럽다. 보통 사람들이 틀을 정하고 독립된 주체에 대한 믿음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서로서로 자기의 틀에 다른 이들을 가두려 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쳐도 이 또한 있는 그대로 이기에 자연스럽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다. 문제는 오직 문제라고 바라보는 시각에만 있지 자연 그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래서 문제는 실체가 없다. 자연인은 이 사실을 안다.


자연인은 세상 모든 사람이 자연인이라는 사실을 안다. 특별한 몸-마음이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이란 없다. 특별함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에 존재할 뿐이기에 특별함은 실체가 없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각자 그 자체로 유일하다. 어느 하나, 같은 사람이 없다. 그저 다를 뿐이지 특별하지 않다. 자연인은 세상 모든 사람이 특별하지 않고 조금씩 다른 자연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반면 보통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른다. 사실을 알든 모르든 달라질 것이 없다. 그래서 자연인은 이 사실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노력하는 자연인이 있다. 사람들은 이들을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송하든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에 어떤 자연인은 최선을 다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이미 자연인임을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대부분 자연인은 누가 와서 물으면 답을 한다. 하지만 알아차리고 말고는 물어보는 이에게 달려 있이기에 여기 집착이 없다. 자연인이 다른 사람이 깨어나도록 도와야 하고 말고는 정해진 것이 없다. 자연인이 가르침을 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이 또한 하나의 틀이다.


자연인은 모든 사람이 이미 자연인임을 알기에 그들에게 어떠한 죄도 없음을 안다. 어떤 개인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죄가 없고 보상받아야 할 선도 없음을 잘 안다. 원죄 따위란 없다. 굳이 원죄라고 하면 죄를 지을 수 있는 개인이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믿는 믿음이 원죄다. 죄는 오직 죄가 있다고 믿을 때만 존재한다. 그래서 죄는 실체가 없다. 그저 믿음 속에 존재하는 환상이다. 반대로 어떤 누구도 자기의 선행이라고 할 선행이 없음을 잘 안다. 독립된 주체가 없는데 누가 있어 선행을 자기 것이라 말하겠는가? 선행은 오직 선행했다고 믿는 생각 속에만 존재하기에 실체가 없다. 죄도 없고 선도 없는데 어떻게 개인이 카르마(업, 業)를 짊어지겠는가? 카르마는 은행에 저축해놓고 나중에 찾아 먹는 적금 상품이 아니다. 카르마는 그저 세상의 모든 일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바다 위에 일렁이는 물결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찾음이 끝나면 자연인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연인임을 잘 안다. 그리고 자기가 자연인임을 모르는 당신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달라지는 것은 없으므로 여기에 어떤 집착도 없다. 이미 있는 그대로다.


책 "반야심경의 비밀"과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가져온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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