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일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 괴테
주인공 도이치는 일본의 괴테 연구자이다. 어느 날 홍차 티백 꼬리표에서 명언을 읽는다. 과연 괴테가 이 말을 했을까. 이 사실을 찾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이 소설의 주요 서사이다. 주인공이 연구자인만큼 논문에 관한 내용들이 초중반에 나와 읽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참을성을 가지고 읽다 보면 명언 찾기 과정이 흥미롭게 다가와 끝부분에 쉽게 다다르게 된다.
이 소설은 명언과 인용, 말에 관해 이야기한다. 보통 명언은 유명세와 권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힘을 가진다. 도이치의 친구이자 동료연구자 시카리는 '명언'의 인용과 표절을 말한다.
뉴턴의 유명한 말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가 있는데—확실히 명언이란 말이야. 자기 지시적이기조차 해—이건 베르나르두스가 처음 한 말이라고 하고 콜리지도 어딘가에서 썼다는군. 정말이지 닳고 닳을 정도로 쓰여서 원전이 뭔지도 알 수 없어. 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도 쿠자누스의 ‘신이 굽어보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뒤집어서 한 말일 뿐이니까.
명언은 인용도 출처도 없다. 검증도 안 된 경우가 많다. 오랜 세월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통찰과 용기, 지혜를 주기에 생명력이 있다. 도이치는 학자이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말을 실제로 괴테가 했는지 명확한 출처를 찾아야 한다. 괴테 전집을 뒤지고, 주변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며 다방면의 노력을 한다. 여러 과정을 거친 후, 그 명언은 도이치의 말로 나온다.
설령 좋은 말은 모두 연기라 해도 그 안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연습하며 입에 붙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면 마침내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
책 뒷면의 '옮긴이의 말'이 소설의 주제를 파악하게 도와준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에는 수많은 책, 수많은 명언, 수많은 말이 있다. 작중 ‘선생님(괴테)’의 말처럼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되풀이할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없이 들어온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쉰다”. 이미 말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이치가 “자신의 말을 결코 끝까지 믿지 못하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 말을 마침내 믿게 되었듯이, 우리가 자신의 언어로 말할 때 그 말은 비로소 진짜가 될 것이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일은 어렵다. 누군가에게 듣고 배운 것이 말이 되고, 내 생각을 정리한 것이 말이 된다. 그 내용을 비판하고, 곱씹고, 쳐내야 자신의 언어가 된다. 단어 하나도 그 안에 담긴 힘의 세계가 있음을 황현산 선생님의 글에서 배운다.
언젠가 서울의 교외에서 '들꽃 피는 언덕'이라는 간판을 단 카페를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옛날 같으면 단지 '언덕'이라는 말만으로는 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언덕'은 꽃 피는 언덕도 되고 눈 내린 언덕도 된다. 언덕 앞에 붙는 다른 말의 길이만큼이나 우리말이 힘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카페의 풍경에 대학의 박사학위 심사 모습이 겹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단어를 무슨 뜻으로 썼느냐고 심사위원이 물으면, 그 단어는 영어의 어느 단어에 해당한다는 대답이 나오고 좌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그 힘을 외부에서 빌려오는 것이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중 '말의 힘' 글에서
영상편집을 할 때 기획의도가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컷들 하나하나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 자신만의 영상언어로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일'도 비슷한 과정이지 않을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 말의 순서와 배치, 말에 쓰인 단어들의 의미.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지만 우리는 계속 이야기한다. 돌아오는 계절마다 감탄하고 한숨을 쉬지만 우리는 계속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