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쓰는 데 어느새 2025년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숫자가 없었더면, 날짜 구분이 없었더면 나는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현대인은 하루 이틀 단위로, 숫자로 시간을 세지만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숫자로 측량이 가능한 것일까.
현대 사회는 참 바쁘게 돌아간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을 얼마나 들여야 하는지, 하루는 몇 시간인지, 어떤 분야든 ‘잘’하려면 얼마나 시간을 써야 하는지 나와있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나 능력의 차이는 고려되지 않고 ‘평균적인’ 혹은 가장 인기가 있는 ‘후기’를 따라 시간은 책정된다. 예를 들어 책을 한 권 쓰는 데 드는 시간이라든지, 풀코스 마라톤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같은 것들도 검색 몇 번을 하면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숫자로 변환된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도구를 가지고 이 숫자로 나와있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든지, 코치의 도움을 받는다든지 하는 식이다. 돈을 쓰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을 쓰면 어딘가에 도달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조금 더 빨리 어떤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현대인에겐 하나의 목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촐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최소 너댓개는 목표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면 또 다른 것을 좇고, 그렇게 업적을 쌓듯 하나하나 쌓아간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성적표를 돌려준다.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한 사람, 또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를 달성한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고득점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취가 자기 자신의 성실한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점수가 높지 않은 사람들도 자신의 성취가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더 열심히, 조금 더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애쓴다. 현대인은 저마다 자신의 등 뒤에 자신이 쌓은 무언가를 지고 다닌다. 누군가를 마주치면 은근슬쩍 자기가 지고 다니는 성취들을 내보이기도 하면서.
참다운 인생이라는 건 무엇일까.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데, 그러면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참다운 죽음이란 어떤 걸까. 많은 것을 등에 이고 살다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면 그 삶은 참다운 것일까. 열심히 사는 우리네 시대를 평가절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숫자로 쪼개진 우리 시간에 대해서, 그러니까 곧 우리 인생에 대해서 물음을 던져 보고 싶을 뿐이다.
또 다르게 사는 인생도 있다.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뭔가 목표를 이루어 자신의 등 뒤에 쌓아 두는 사람 말고, 자기 인생을 가지고 타인의 등 뒤에 쌓을 무언가를 위해 애쓰는 사람. 대개는 자신을 위해 쌓는 것과 남을 위해 쌓는 것이 섞여 있다. 본디 인간이란 입체적이고 복잡다단한 것이 아니던가.
어떻게 살아야 좋은 걸까. 나는 이 삶의 영문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터전에 있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바다, 바람, 돌멩이, 이름모름 새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라는 이 신비로움은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좀 더 줄여서, 나는 있다. 칸트의 명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떠올린다. 사실 잘 모른다. 생각하는 거랑 존재하는 게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칸트쯤 되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 같은 범인에겐 그저 ‘존재한다’라는 결론만이 덩그러니 주어져 있다.
삶의 근원을 모른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만인 것은 아니다. ‘내 인생 같은 거 모르겠으니, 될 대로 되라지.’ 하며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삶이,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과 이 삶을 ‘잘’ 살고 싶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 마음속에 뿌리 깊은 감각이다.
잘 살고 싶어서 오랜 고민을 했다. ‘잘’은 단 한 글자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족히 수만 개의 문장과 문장으로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인생들이 들어있다. 나는 아주 조금, ‘잘’이라는 단어를 뜯어보았다. 누군가는 부귀를 누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했다. 윤리적으로 조금 때가 묻더라도 돈을 버는 게 최우선인 사람들이다. 가끔 눈속임을 하기도 하고, 타인의 눈속임을 눈감아 주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돈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편이, 그들에겐 잘 사는 인생, 잘 가고 있는 증거이다. 또 누군가는 인기를 획득하는 인생을 좇아 살았다.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 그들은 타인이 되어 버렸다.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이들은 가장 많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소위 말해 아주 젠틀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모든 이에게 인정을 받는 길은 동시에 모든 사람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일 뿐이다. 돈과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이 가장 빈번하게 ‘잘’에 포함된 내용이다 보니 몇 자 써 보았다. 물론 나는 각 사람이 좇아 살아가는 ‘잘’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보통 좇아 살아간다는 것들을 모시고 살아 봤다.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돈 많이 벌어 보려고 꽤 큰 기업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소속감을 등에 업고 우쭐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차곡차곡 돈이 쌓이는 걸 보면서 안도하기도 했고, 비싼 물건을 소비하고, 탐색하는 일을 낙으로 삼기도 했다. 또 여러 사람에게 잘 보여야 했으므로 한 두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것을 점점 지워 나갔다. 변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말 그대로 십인 십색이었으니 말이다.
‘잘’에 대한 고민은 깊어 갔다. 세상에 있는 사람 수만큼 ‘잘’이라는 게 있어 보였고, 대체로 인기 있는(?) 삶만을 탐구한다고 하더라도 내 인생은 짧을 것이 뻔했다. 그러다 삶과 죽음이 한 단어라는 어느 문장을 보았다.
잘 산다.
잘 죽는다.
태어난 건 신비이다. 내가 뭘 잘해서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잘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조차 없다. 그냥 모른다고 쓰면 좀 그러니까 괜히 ‘신비’라고 써 본다.
죽는 건 좀 다르다. 내가 살아온 만큼만 죽을 수 있다. 멋지지 않게 살고서는 멋지게 죽기를 바랄 순 없는 일이다. 관짝 뚜껑 덮고 그 아래 누워 있다고 생각하고 내 삶을 생각해 보니, 막연했던 ‘잘 산다.’가 조금씩 구체화되어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긴박함과 용기 같은 감정도 솟았다.
거대한 시간의 세계에서 잘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이제 조금 물에 뜨는 것 같기도 하다. 잘 사는 건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이다. 물론 용기도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잘 산다는 데 대한 자기만의 감을 잡으려면 뭔지 모르지만 일단 살아야 한다. 산다는 단어에 ‘잘’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고민하고, 과감히 시도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 요즘은 내 삶이 점점 좋아진다. 평균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지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괜찮은 정도가 되었다. 살았고, 고민했고, 좀 다른 길을 기웃대다 발을 들여보기도 한다. 나에겐 뜻을 함께하는 아내가 있고, 우리에겐 우리 삶의 결과인 아이도 있다.
여전히 답 같은 건 없다. 찾아낸다 해도 그걸 말로 풀어낼 수 있을진 모르겠다. 내가 오랫동안 찾아온 건 어쩌면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함께 고민해 온 아내도 이 비밀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또 앞으로 함께 힘내서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