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셉 Aug 16. 2023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된 건지.

재능의 이력서 #1

    글 쓰는 사람 정말 많다. 이 많은 사람이, 매일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지 글이 쏟아져 나온다. 글을 왜 쓰는 것일까? 나는 글을 왜 쓰는가. 모르겠다. ‘어쩌다가’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지난날을 한번 돌아보려고 한다. 스티븐 킹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재능의 이력서’ 같은 글을 쓰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어쩌다가’ 글을 쓰는 지금까지 왔는지 한번 기억을 더듬어볼 예정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음악이나 체육, 그림을 배우는 것처럼 글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은 잘 없고 가르치는 사람도 잘 없기에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꽤나 어린 시절부터 글을 좋아했던 것 같다. 또래들보다 말을 빨리 했다. (보통의 부모가 그렇듯 나의 부모님도 내가 엄청 일찍 말을 했다고 하셨다) 언제쯤부터 말을 했는지,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어릴 적 엄마와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던 간판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몇 살쯤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간판을 읽는 게 당연한 나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간판들을 읽었던 장면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때 글과 관련하여 기억나는 건 받아쓰기와 일기장이다. 으레 그렇듯 저학년 때는 받아쓰기를 열심히 했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받아쓰기가 재미있었다. 문제가 쉬웠는지 어쨌는지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잘 틀리지 않았던 것 같고, 그래서 더 재밌어했던 것 같다. 줄 간격이 2센티는 되었을 받아쓰기용 공책에 빨간색 색연필로 동그라미 표시와 점수가 쓰여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릴 때 간판을 열심히 읽은 덕분일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따로 자습을 했을 리도 없는데 매번 점수가 좋았다. 


    재능이나 흥미는 대체 어디서부터 일까? 일찍 말을 했다는 것부터 시작일까? 버스 차창 밖 간판 읽기를 신기해했던 어른들이 계속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까? 잘해서 좋아하게 된 건지, 좋아해서 잘하게 된 건지, 이쯤 되니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사실은 같은 말이 아닌가. 간판 좀 읽은 거랑 받아쓰기 잘하는 걸로 재능을 논한다면 너무 나간 것일까. 자연스럽게 끌리는 뭔가가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보면 어떨까. 천재가 가질법한 강한 흥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어렸을 때, 어떤 형태로든 관심을 표현했던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이유를 알 수 없는데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흥미요 재능의 씨앗일지도 모른다. 으레 성공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성공했다고 하는 것을 떠올려 보자. 그들도 그 일이 왜 좋은지, 좋아서 잘하게 된 건지 잘해서 좋아하게 된 건지 전혀 모른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재밌었기 때문에 잘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어린아이가 그렇듯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명이 적힌 초록색 그림일기장이 있었는데 일기장의 존재를 잊을만하면 가끔 썼었다. 기괴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거의 언제나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일기를 썼다. 300원이나 500원쯤 하는 공책 두께 정도였는데, 몇 장이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일기 쓰기가 그리 재밌지는 않았지만 초록색 일기장이 열댓 권 쌓여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언어를 좋아하고 썩 잘했다는 사실은 거의 언제나 드러나는 경우가 없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음악을 잘하는 아이,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이들은 쉽게 드러나지만, 읽고 쓰는 능력은 아주 평범해서 당연한 정도로만 여겨질 뿐이다. 딱 한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두 차례 글짓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독후감에 단골로 등장하는 책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한 편을 썼고, 6학년 말미에 ‘끄트머리’라는 주제로 초등학교 생활의 마무리와 중학교 입학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을 글로 썼었다. 글로 상장을 받아본 유일한 경험이다. 정확히 어떤 내용을 썼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원고지 뭉치가 떠오르고, 원고지를 어떻게 쓰는지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상을 받아서 기분은 좋았지만 매일 글을 쓰는 재미에 빠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글이 악기처럼 조금만 더 알아차리기 쉬웠더라면 좀 더 재미를 붙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중학생이 되었고, 여전히 글을 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중학교에 오면서는 일기 쓰기도 하지 않았다.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국어 과목만큼은 재미있었다. 선생님과 사이도 좋았고, 성적도 잘 나왔다. 매번 국어 과목만큼은 1등이나 2등을 했다. 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종종 문학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죄와 벌>을 몇 번이나 시도했었는데, 중학생이 읽기에는 벅찼다. 토요일마다 국어시간이 있었는데, 가로세로 낱말퀴즈를 했었다. 나는 이 시간을 매우 기다렸다. 분단별로 낱말을 빨리 맞추는 게임이었는데 나는 꽤나 내성적인 학생이었음에도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나중에는 선생님이 구해온 게임 파일을 나도 구해보고자 인터넷을 뒤적였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입시 전선에 뛰어들었다. 물리 시간에 졸다가 분필을 맞았다. 수학은 싫지 않았지만 과학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나는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해질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고, 문과를 선택했다. 공부는 즐거웠다.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공부가 많았다. 읽고 또 읽었다. 그 무렵 성공담을 글로 엮어낸 글을 읽으며 입시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던 것 같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도 많이 읽었고, 교과서도 많이 읽었다. 읽는 게 워낙 좋아서, 지도를 보면서 공부해야 하는 과목도 글로 공부했다. (한국지리 과목은 지도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텍스트만을 고집했다. 그림보다 글이 훨씬 편했다.)


    고등학생 때는 플래너 같은걸 매일 쓰긴 했지만 일기를 쓰지는 않았다. 교내 문집에 매년 독후감이나 격려의 글 같은 걸 써서 제출하긴 했지만 으레 하는 것들이어서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쓰기를 그리 싫어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입시에 꽤나 큰 압박을 느꼈다. 가끔 문학 작품이나 자기 계발서를 읽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교과서와 입시 관련 자료였다.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입시를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이때 다독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수능 국어도 재밌게 공부했다. 고등학교 국어를 공부하면서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유의어의 뉘앙스 차이 같은 걸 설명해 주는 책이었는데, 입시로 바쁜 와중에도 즐겁게 읽었다. 아, 그리고 책을 무지 많이 샀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서 용돈을 탈 때마다 용도를 자세히 밝혀야 했는데, 책을 살 때는 부모님이 두 번 묻지 않으셨다. 문제집도 많이 샀지만 책도 많이 샀다. 장승수, 고승덕, 반기문 같은 분들의 성공스토리를 많이 읽었다. 뿐만 아니라 입시 성공 스토리도 많이 읽었다.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기도 했고, 쉴 때도 재미만을 추구하기엔 왠지 입시생이라는 신분의 무게가 있어서 그런 책들을 내 마음의 화덕에 땔감으로 집어넣으면서 계속 타오르려고 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나를 살펴보면 그래도 글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다만 학생에겐 정답을 잘 찾는 일이 요구되었고, 흥미를 가진 일에 몰두하기보다 못하는 일을 더 열심히 해서 평균점수를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부족한 곳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난날을 떠올려보니 글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듯해 기쁘다. 나의 흥미가 좀 더 강했다면, 마음 깊이 묻혀있지 않고 얕은 곳에서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른이 되어 지금에서야 상상도 후회도 아닌 생각을 품어 본다. 


    회사를 나올 땐, ‘이건 아니다.’는 생각으로 나왔다. 나오고 나니 다음 길을 찾아야 했다. 어떤 형태로든 직장을 나온 행동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다. 또 그럴싸한 목표를 설정하고 무작정 달리기보다 잠시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든 이직을 하는 일은 쉬운 길이었다. 다만 똑같이 향방 없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쉬운 길보단 조금 답답할 수 있지만 나의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글을 써야겠다고 먼저 생각을 했는지, 지난날을 돌아보다 보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매번 누가 물으면 ‘어쩌다가’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멈춰서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삶을 살았고, 내가 좋아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어쩌다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건지. 


    모든 인간은 고유한 인생을 살아간다. 세상에 누구도 타인이 되기 위하여 살아가지 않는다. 내가 ‘나’가 아닌 타인이었어도 상관없는 인생이었다면, ‘나’로써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사회는 실존하지 않는 개인을 모델로 삼고 모두가 비슷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나’를 잃어버린 사회는 역설적으로 MBTI 같은 심리검사를 통해 자신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어릴 적 좋아하던 활동은 무엇이었으며, 즐겨 먹는 음식은 무엇인가. 자주 듣는 음악은 무엇이며 시간을 잊고 몰두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흔한 예스맨 중에 하나인가. 결승선 없는 트랙을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나만의 길을 가는가.자연에 있는 모든 동식물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벌이 되고자 하는 나비를 보았는가. 해바라기가 되고자 하는 수국을 보았는가. ‘나’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쉬운 질문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꼭 품고 살아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 나다움을 발견하고, 그 일을 즐거워하는 나를 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 일을 아주 잘한다면 어떨까. 더할 나위 없는 삶이 아닌가.


    나의 ‘어쩌다가’를 조금 꺼내 보았다. 여지껏 글을 많이 써오지는 않았다. 일찍부터 글 쓰는 흥미에 푹 빠질 수 있었다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서른셋이 되었다. 늦은 건지 빠른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이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지금 꿈을 꾼다. 글을 쓰는 인생을 살고 싶다. 글은 나보다 오래 산다. 글을 남겨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 어눌한 내 글이 누군가의 더 나은 삶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인생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멋진 글이란 곧 멋진 인생이기 때문에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아빠와 면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