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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Aug 15. 2023

아빠와 면도기

아빠를 생각하며

   물건을 보면 사람이 떠오르는 때가 있다. 나는 일회용 면도기를 보면 아빠가 떠오른다.


   아빠는 200원짜리 일회용 면도기만 사용하셨다. 


   입가에 솜털이 거뭇거뭇해질 무렵에야 면도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왜인지 아빠는 늘 일회용 면도기만을 사용하셨다. 집안에 남자는 아빠와 나뿐이었으므로 나는 면도기란 모두 내가 본 것과 같은 일회용 면도기뿐인 줄 알았다. 더 나이가 들어서야 면도기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어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는 새 면도기를 사 썼다. 그때부터 쭉 밖에 나와 살았기 때문에 아빠의 면도기를 영 잊고 살았다. 


   내가 보통의 대학 생활을 하고 아르바이트도 했으면 아빠에게 아들 키운 덕을 보여드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부모님께 상의드리지 않고 휴학한 적도 있고, 대학을 졸업해야 할 나이에 중국 교환학생까지 다녀오겠다며 부모님을 졸랐다. 그 덕에 나는 4년 과정을 6년 만에 졸업했고, 스물여섯에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철이 안 들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다.


   전공을 세우신 할아버지 덕분에 군에 가지 않았던 아빠는 아들이 군인이 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대학 공부도 잘 마쳤고, 중국 연수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군대만 다녀오면 부모님께 효도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내가 군대를 갈 때쯤, 아빠는 평생 다녔던 직장에서 은퇴하셨다. 자식도 다 키웠고, 이제는 집에 머물면서 좀 쉬셔도 될 텐데 아빠는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그때부터 아빠는 평일엔 타지에 머물면서 일하시고, 주말엔 집에 오시곤 했다. 


   군에 가면 철이 든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나는 남들보다 쌀밥을 한참 먹고 군대에 가서야 철이 들었다. 이십 대 후반이 되면서 매일 면도를 하게 되었다. 이십 대 초반의 동료들과는 달리 나는 하루만 면도를 하지 않아도 입가가 거뭇거뭇 해졌고, 지적받기 일쑤였다. 철이 들고 면도를 매일 하던 어느 날 휴가를 가게 되었다. 아빠는 평일엔 타지에 계셨기 때문에,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는 직접 계신 곳으로 찾아가야 했다. 아빠가 살던 방에 들어섰을 때 마음을 잊지 못한다. 엄마는 집 정리 좀 하고 살라며 잔소리를 시작하셨지만 나는 왠지 아빠가 안쓰러웠고 멀리까지 나와서 일하고 계신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엄마와 나는 돌아가던 중에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청소라도 좀 하고 드실 만한 거라도 채워놓고 돌아가고 싶었다. 차를 돌려 마트에 들렀다. 간단한 청소 도구를 좀 사고, 아빠가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도 샀다. 아직도 일회용 면도기만 쓰는 아빠 생각이 나서, 왠지 나는 좋은 것만 쓰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해서, 마트에 있는 제일 좋은 면도기와 날을 샀다. 늦은 나이에 군에 갈 때까지도 경제활동을 해본 적도 없고 늘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살았는데, 나만 늘 좋은 것을 누리는 게 아닌가 죄송스러웠다. 물건을 잔뜩 사고, 면도기는 손에 든 채로 아빠가 있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밥 먹고 돌아간 줄만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니 아빠는 놀라셨다. 아빠 드시라고 장도 좀 보고 했다며 이것저것 꺼내 놓으면서 면도기도 슬쩍 건넸다. 일회용 쓰시지 말고 이제 이거 쓰시라고, 제대하면 돈 벌어서 더 좋은 걸로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안 사도 되는데.” 하셨지만 좋아하셨다. 경상도 스타일의 우리는 이런 무드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내 아빠는 장바구니를 뒤적이고, 나는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군에서 한창 청소를 열심히 할 때라, 아빠 화장실도 열심히 닦고 방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쓰레기를 모두 들고 나왔다. 밤은 조금 더 늦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에게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던 것 같다. 왠지 나 때문에, 부모라는 이유로 평생을 고생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마음 한편의 무거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그 해 겨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평생 일만 하셨는데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돌아가셨다. 아빠가 계셨던 빈 집에 가본다. 내가 선물한 면도기를 뜯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 서랍을 열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공부한다며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을 드렸던 것 같다. 해외연수를 다닐만한 형편도 아니었는데,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면서도 나가겠다고 우겼다. 아빠라고 왜 쉬고 싶지 않으셨을까. 말씀이 많지 않으셨던 아빠는, 행동으로 묵묵히 가장의 책임을 지고 계셨다.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곱게 놓인 새 면도기와 뚜껑이 열린 일회용 면도기 박스가 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좀 더 일찍 돈 벌어서 아빠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드렸으면 하는 후회를 했다. 돈이 아니더라도, 아빠의 마음을 좀 더 헤아려 드릴 수는 없었을까 후회를 한다. 이렇게 일찍 가실 줄 알았으면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용돈이라도 드렸으면 하고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아빠에게 못 해준 말이 너무 많은데, 갚아 드릴 것이 참 많은데. 마음씨 착한 아빠는 혹여나 내게 부담을 지우실까 그렇게도 급히 떠나셨는지 모르겠다. 이리 급하게 가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서두를걸 그랬다. 아빠의 인생을 내가 모조리 다 써버린 것만 같아 가슴이 아프다. 


   아빠는 가족을 참 사랑하셨던 분이다. 사랑은 동사가 아니기에 한마디 말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아빠는 주는 사랑을 하셨다. 생명을 전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빠의 삶 전체를 가족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내어 주셨다. 아빠의 삶을 통해 사랑을 정의해 본다. ‘사랑이란,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내어주는 것이다.’ 주기만 하셨던 아빠에게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어 마음이 아프다. 이제는 무엇도 받을 필요가 없는 곳에 계시겠지.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조금 일찍 쉬게 해 주시려고 신께서 아빠를 일찍 부른 것이 아닐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를 통해 생명체가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누구나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고 자기를 돌보기 위해 애쓰는데 자식에게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까지 내어주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빠는 급히 가버리셔서 물어볼 수가 없다. 아빠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셨다. 아빠가 남기고자 전 인생을 바쳤던 대상이 가족이었고 나였던 것 같다. 가장이라는 이유로, 아비라는 이유로 삶을 내어 주셨다고 생각한다. 늦은 후회는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갚아드릴 아빠는 이제 가시고 없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값진 것들은 내가 갚을 수 없는 것들이다. 선물로써 주어진 생명, 아름다운 자연,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건강한 몸,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 부모의 헌신적인 보살핌, 성장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의 호의, 배우자의 사랑과 신뢰. 이런 것들은 돈으로도,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다. 다만 반응하여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갚을 수 없는 것을 받은 사람, 그걸 아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나도 언젠가 날 닮은, 우리 아빠를 닮은 아이를 낳겠지. 나도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한 생명을 이 땅에 잘 심고 갈 수 있다면 참 좋은 인생이 될 것 같다. 아빠가 보고 싶다.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은 못 했지만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면도기를 보다가, 아빠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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