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셉 Aug 02. 2023

사생관 : 삶과 죽음, 그리고 일

어떤 인생이 값진 인생인가.


   죽음 후에 남는 것들. 노을을 보며 죽음에 대해 떠올려 본다. 하루를 시작하며 떠오른 해가 어느새 저물어 가는 것처럼 내 인생도 주어진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저물어 가겠지.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생각한다. 살아 간다는 것은 곧 죽어간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같은 뜻을 표현하는 다른 단어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이다. 내 인생의 모래시계에는 얼마만큼의 모래가 담겨있는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살아 온 만큼의 모래는 죽음 편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다. 바로 생명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난다. 조상의 몸을 통해 태어나고, 유전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태어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의 탄생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그저 ‘태어난다’. 그리고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죽는다’.



   삶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한다. 내게 주어진 이 삶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어떻게’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내게 물어 오는 것 같다. 탄생과 죽음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언제 태어날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이 삶을 어디에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산다는 것은 곧 시간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시간은 곧 생명이다. 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삶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인생의 그 어떤 순간도 되풀이되지 않으며 어느 지점에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삶은 찬란한 것이기에, 너무도 값진 것이기에, 어찌하여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있는지, 언제 시간이 다하여 죽을지는 모르나 의미 있게 살아보려 애쓰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만일 내 인생이 한 달 남았다고 할 때,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지금 삶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만한 인생이 또 있겠는가. 많은 통장 잔고를 남기고 죽으면 행복하고 뿌듯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평생에 많은 것을 누리고 편안하게 살아왔다면 좋은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세상에 내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가고 싶다. 나라는 사람이 일평생 살아왔으므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머물렀던 자리가 나로 인하여 조금 더 깨끗해지기를 바란다. 내가 있었으므로 세상에 없던 것이 창조되면 좋겠다. 내가 있었으므로 누군가의 인생이 값지고 의미있어 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할 때, 나는 내 몫의 인생을 모두 살고 가노라고 나의 죽음에게, 남아있는 삶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거액이 든 통장을 손에 꼭 움켜쥐고 “아, 조금 더 누렸어야 하는데.” 하며 죽는 사람이 있을까. 죽음이 나를 찾아올 때 과연 돈을 더 벌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것인가. 죽음 앞에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삶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고 나다움을 찾고 싶다. 삶에서 일은 필수 요소이다. 대부분 싫든 좋든 ‘일’에 상당 부분 시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일에서 가치와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삶을 재정비 하기 위해 직장에서 나왔다. 나와서 나를 다시 본다. 나다운 것은 무엇인가. 자연스러운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낯설다. 대답하기 힘들다. 나는 뭘 좋아하지. 좀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뭐지.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 회사를 나오려고 마음을 먹으니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많이 걸렸다. 일보다 일의 대가가 일의 목적이 되어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삶을 정돈했다. 불필요한 소비습관을 버렸다. 라이프스타일을 수정하고 단아하게 삶을 가꾸어 보았다. 돈이 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것 처럼 소비가 삶의 목적이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 살고 차를 타야지, 차가 나를 타고 내가 집을 위해 일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진정 의미를 찾고자 하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야 했다. 가난하게, 수도사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의미 있는 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위해 일하는 마음을 먼저 뛰어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가. 돈을 얼마나 버는가. 두 개의 축으로 일을 바라보면 일의 종류를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일은 좋아하고 돈도 잘 버는 일일 것이고, 가장 안 좋은 것은 좋아하지도 않고 돈도 못 버는 일일 테다. 안 좋아하기 때문에 미치지 않을 것이고, 푹 빠져 있지 않으니 잘 하게 될 수 없다. 일을 못하면 보상 수준도 낮을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돈도 별로 못 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못하는 일로 타인을 도와야 하니 탁월하게 도울 수도 없다. 더 세상을 나은 것으로 만드는 데에도 적은 기여를 할 수 밖에 없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잘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고 싶다.



   물어야 한다. 정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똑똑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똑똑하다. 디젤의 창업자 렌조 로소의 말을 떠올려 본다. 바보가 되라. 답을 다 알고 있는 똑똑이가 되지 마라. 세상을 바꾸는 건 질문하는 사람이다. 정답을 아는 사람은 시도하지 못한다. 안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될만한 일만 시도한다. 좀처럼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내 인생은 실패할 만한 일에 도전해오지 않은 ‘똑똑한’인생일 뿐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열심히 달리는 마라토너였다. 바보가 되기로 했다. 길이 아닌 곳으로 가보고 안될 것 같거나 말거나 도전해 본다.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하늘을 나는 새도 보이고 이따금 뛰어오르는 물고기들도 보인다. 같은 종의 동물도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조류며 동물도 그러한데. 인간이야 말로 고유한 개성을 가진 존재다. 같지 않아도 되는데 왜 표준을 정해놓고 그 삶에 나를 맞추려 했던 걸까. 트랙을 벗어나려면 두렵지만 트랙을 계속 달리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길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에게 해바라기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이미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의 자연스러움, 나다움을 찾아야 한다. 물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물으려니 때로 답답하다. ‘표’가 안 나는 일이다 보니 경제 논리에 길들여진 내 머리가 답답해 한다. 포기할 수는 없다. 나를 찾아낼 것이고, 그 일을 하며 세상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나다워지자, 나로 인해 세상이 더 나아지도록 하자.





작가의 이전글 나는 글을 써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