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과 인생

추석 인 더 포레스트

by 정필

이번 추석은 숲 속에서 보냈다. 평소라면 육지로 가족들을 만나러 다녔겠지만 명절 때가 되면 널뛰기하듯 오르는 비행기 표 가격도 부담스러웠고, 추석이 있는 달을 제외하고 직전 세 달 모두 가족들을 만났던 터라 이번 추석은 제주에서 아내와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직 아이도 없고, 양가 모두 제사상을 차리거나 가족 행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어른들은 조금 서운해하시기는 했지만 이해해 주셨다.


나와 아내는 천천히 산책하듯 살아가는 사람이다. 추석이 되면 하루 정도 어디 숲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자고 진작에 합의했다. 잠시지만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지내고 싶었다. 중산간 풀빌라나 펜션은 자연 속에 조용히 머물고자 하는 취지에 맞지 않게 가격이 너무 화려했다. 편리한 시설과 첨단장비가 갖춰진 곳이 많았지만 어쩐지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것들이라 여겼다.


우리는 휴양림 중에 한 곳을 선택하여 숙박을 예약했다. 소박하게 생긴 초가 모양의 숙소가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는 옷가지 몇 벌만 달랑 챙겨서, 제주에서 제주로, 바닷가에서 산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제주에 살고 있지만 늘 살던 터전을 떠나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제주로 이주해 온 지 5년 차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반쯤은 도민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관광객으로 살고 있나 보다. 어느새 제주가 익숙해져서 좋고, 또 한편으로 늘 설레는 마음을 갖고 곳곳을 둘러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제주도민들은 제주의 경관을 보고서도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이 많았다. 돈 주고 자연을 보러 온다는 것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가까이 있으니 어느새 당연해진 건 아닐까. 제주에 살아도 자기가 사는 삶의 반경을 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어쩌면 관광객으로 와서 보는 제주는 도민이 수십 년을 살아도 볼 수 없는 광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평가는, ‘저 사람은 아무 일에도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살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들이 많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익숙함 속에서 그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움을 만나는 반면, 누군가에게는 익숙함이 곧 지루한 일상이 되어 버린다. 쉽게 ‘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매일 뜨는 태양, 매일 걷는 산책로,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의 온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을 생각한다. 반복되어 어느새 일상이 된 것들을 떠올리며 익숙함이 ‘뻔함’으로 끝나지 않고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재발견하는 눈을 갖게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수준에 이르러서 ‘다 안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매일 새롭게 대상을 바라보듯 익숙함 위에 계속 새로움으로 덧칠해 가고 싶다. 그리하여 각 대상은 내 안에서 다시 정의되고, 나와 대상은 날마다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다. 겉을 힐끗 본 후에, 아니면 내게 효용이 되는 ‘기능’만을 익힌 후에 대상을 ‘안다’고 말하지 말고, 날마다 그 대상과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가고 싶다. 그런 걸 글로 써내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을 두 번, 세 번 사는 작가의 인생이며 일상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특별한 삶은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하는 삶이기도 하지만, 매일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인생은 없다. 반복되는 인생의 경험 속에서 일상을 재발견하는 눈을 가진다면 진부한 일상은 새로움으로 변모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은 좋은 눈을 가진 사람이다.


천천히 올레길을 걸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 처음 가 보는 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었다. 아내와 나 우리 둘에게는 반드시 완주해야 한다는 목표도 없었고, 빨리 걷고 몇 시까지 입실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을 누렸고, 서로가 목적이 되어서 순간을 살았다. 사랑이란 대상 자체를 기뻐하고 원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서로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다음 코스나 입실 시간, 스케줄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분명 다툼이 생겼을 것이다. 일정은 우리 예정대로 되지 않았다. 40분 걸려 도착한 김밥 가게가 휴무였고, 올레길은 생각보다 길어서 완주할 수 없었다. 돌아가는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태양은 점차 정수리를 달궜다.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였지만 괜찮았다. 일정을 완수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었고, 함께 있음으로 서로를 목적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부에 있는 물건이나 경험이 아니라 순수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목적으로 하고, 그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사람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재차 깨닫게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어느새 선선해진 바람은 트레킹에 안성맞춤이었다. 낯설지만 정겨운 제주의 어느 한 곳을 아내와 함께 걸었다. 마치 우리를 따라다니며 노래하는듯한 새소리를 배경음 삼아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속을 누비고 다녔다. 빨강 파랑 모자를 쓴 시골 가옥 앞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마을 내에 있는 도랑 속에 떼 지어 다니는 물고기들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돌 위에는 작은 게 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저 먼 들판에는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밭 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또 다른 여행자들이 큰 배낭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다. 자연 속에 있음을 만끽했다. 선선한 가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더없는 느긋함 속에 행복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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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림 내의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초가집 모양이어서, 한 층 숲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숲이 뿜어내는 나무 내음이 마음을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나뭇잎 사이를 뒤적이는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모를 동물을 한참 구경했다. 숙소 거실에 앉아 열린 창 너머로 불어오는 숲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쉬었다. 아주 잠시지만, 너무 많이 연결된 사회 속에서 단절을 통한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일몰 시간이 지나자, 휴양림 내부는 금세 밤이 찾아왔다. 도심 속에 있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 가로등 불빛, 비행기 소리 같은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여섯 시 삼십 분이 되었을 뿐인데 휴양림 내부는 이따금 나뭇잎 더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아무 불빛도 없었다. 하늘에는 추석을 맞아 큰 달만이 태양처럼 걸려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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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 초가집 한 동, 그 속에 평소보다 옅은 불빛을 켜 두고 아내와 나는 고요함을 누렸다. 늘 머물던 제주였고, 항상 함께하는 나와 아내였지만 낯선 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새로웠다. 우리 마음을 분주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서, 아무런 필요나 요구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인하여 잠잠히 즐거워하고 평소에 하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나누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왔고, 내게 가장 익숙한 사람이 또 한 번 낯선 사람이 되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낯설었던 그곳이 조금 익숙해졌고, 낯섦을 더한 익숙함은 한층 더 깊은 익숙함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샌드위치 한 개로 요기를 했다. 여행 간다고 하면 바리바리 싸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는 간단하게, 담백하게 지내는 게 보통이다. 화려하게, 많은 것들을 가지면 삶이 채워지는 것 같아도 오히려 삶은 적은 것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을 안다. 많은 선택지가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때로는 혼란을 줄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 가벼이 요기를 하는데,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비 예보는 없었고, 당연히 우산도 없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기도 하고, 숲의 각종 식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내는 음악을 들으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5분 거리에 있는 차에 가서 작은 비닐우산 한 개를 챙겨 왔다. 우산은 두 개였지만 일부러 하나만 챙겼다. 덜 젖는 것보다 같이 쓰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좁은 숲길을 작은 투명 비닐우산을 쓰고 걸었다. 고사리 군락과 나무, 여러 모양의 버섯들, 도토리 같은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자근자근 밟히는 나뭇잎 소리도 좋았고, 꺾어진 나무를 보면서 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아내와 나름 추측을 해 보기도 했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숲길을 걷고 나니, 열심히 우산을 들고 다녔음에도 둘 다 물 한 컵씩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경험은 두 관계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 떠나간 곳에서 나와 아내는 한층 더 친밀해졌다. 익숙함 위에 낯섦을 조금 더해서 익숙함을 더했고, 평소보다 더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일상 속에서는 많은 것들을 신경 써야 한다. 현대 사회의 최신 기술은 우리를 모두와, 모든 곳과 연결되어 있게 해 주었다. 수많은 선택지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억압한다. 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고를 수 있지만 어느 것도 고르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수많은 연결 속에서,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 오히려 부자유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숲 속에서의 하루는 짧았지만 단 하나의 선택지가 주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통신기술로 연결된 수많은 사람과 사건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오직 단 하나의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빛 공해와 소음 공해가 많은 도심에서 나와서 조용한 숲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적을 만끽했다. 종종 우리는 많은 것을 삶에 더하면 삶이 더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삶의 지혜는 빼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글도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삶에 겹겹이 쌓인 군더더기를 빼고 또 빼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들 몇 가지만 남지 않을까. 그것들을 꼭 끌어안고 이 삶을 살아간다면 단단하고, 단정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정말 중요한 것들만 남은 삶이고 싶다.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빼 본다. 빼고 또 빼면, 마지막까지 남는 것,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올해 추석은 이렇게 지나간다. 꽤나 풍요로운 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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