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과 인생

저는 이제부터 바보입니다.

어느 가을의 독백

by 정필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읽기와 쓰기가 점점 더 보기 드문 일이 되어가는 요즘, 글을 쓴다는 자체로 나를 특징짓기에 충분하다. 아마 이런 상태로 조금만 더 지나면 나는 읽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대단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쓰는 행위가 글의 내용보다 더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쓰는 행위와 시간이 만나 언젠가 대단한 글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도 갖고 있다. ‘쓰다 보면 몇 문장쯤은 괜찮은 게 나오겠지.’ 라며 편한 대로 생각하고 만다.


글을 쓰려고 가만 앉아서 글쓰기에 대해서 적어 내려가다 보면 글쓰기가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글을 쓰지만 어떤 내용을 담을지 항상 고민하는 것과, 매일 인생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고민하는 모양이 꼭 닮았다. 글에 무엇을 채워 넣을 것인지,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이 두 문제가 참 닮아 있다. 다만 글로 써내는 것에는 실제 삶보다 제한이 덜하다는 특징이 있겠다. 글은 무엇이든 써낼 수 있지만 삶은 내가 원한다고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생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으며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만을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태어남은 저마다 알 수 없는 때에 불쑥 찾아온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태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고,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다 자기 손바닥 안에서 계획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형제자매를 선택할 수 없다. 살아갈 시대와 국가를 선택할 수도 없으며, 갖고 있는 자질 또한 일정 부분 유전으로 받는다. 이처럼 삶은 던져져 있다. 이후에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은 우리 손바닥 밖에 있는 일들이다. 우리는 다만 각각의 삶의 장면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인생이 있지만 모든 가능한 인생이 내 것이 아니다. 인생의 여러 장면 속에 선택해 온 것으로 우리는 점점 ‘나’에 가까워진다. 모든 인생을 살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볼 수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살지 않은 다른 인생을 기웃거리는 것은 명백한 시간 낭비이다.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은 버리고, 내가 선택한 가능성에 전부를 걸어 살아가는 삶이 멋진 삶이다. 삶은 내가 그려보는 만큼이 아닌, 내가 사는 만큼이 내 삶이기 때문이다.


글도 비슷하다. 내가 쓸 수도 있었을 모든 글은 사실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쓴 글만큼만 내 것이다. 쓸 수도 있었을,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쓰는 데에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쓸 수 있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면 무엇이 됐건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온 마음을 써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내 손에 있는 내 삶이 소중하다. 내가 쓰고 있는 지금 내 글이 소중하다. 손에 삶을 소중하게 쥐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것을 탐내는 모습으로 살 수는 없다. 설령 다른 것이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두 가지의 삶을 모두 살아갈 수 없다. 지금 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다음 것을 잡을 수 없다. 비겁하지 않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삶을 선택해야 하는 때가 온다. 이쪽 편과 저쪽 편의 좋은 점만을 취하고자 욕심을 내면, 결국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갈 수 없는 때가 온다. 그때는 그동안 쥐고 있던 모든 것을 그대로 쥐고 가던 길을 가든지, 아니면 새 길을 가기 위해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책임 있는 삶은 모두 포기를 동반한 선택을 거쳐 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아 볼만한 인생은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 외에는 다 빼고 배낭 하나만 챙겨서 떠나는 여행이 아닐까.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타인의 눈이나 외부 세계의 기준에 조금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이 바보 같아 보일지는 모르나, 사실 전혀 바보와는 거리가 먼 인생만을 살고 있는 그 사람이 오히려 바보인지 모른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수백 수천 개의 타인의 눈에 맞춰 자기를 바꾸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 중에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을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자는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하는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는 어리석은 자들의 우직함으로 변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스티브 잡스도, 렌조 로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회는 쉽게 그들을 ‘바보’라고 규정지을지 모르나, 결코 바보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난 참 지혜롭게 살았다.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나를 잘 맞추었다. 내 안에는 가면이 여러 개 있었다. 직장에서는 이 가면, 가정에서는 이 가면, 친구들과는 또 다른 가면, 바꿔 가며 다른 사람 행세를 했다. 이 과정에서 바꾸면 안 되는 것들까지 바꿔 가며 ‘타인이 원하는 나’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작은 아이는 성장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던 것 같다. 누구도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늘 나는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장소에 따라 일정 부분 가면을 바꾸어 쓰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바꿔 쓰면 안 되는 것들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어느 장소에서도, 누구에게도 내어주면 안 되는 핵심 요소임을 깨닫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일하는 나도 있고, 친구들끼리는 격식 없이 장난치는 모습도 있지만, 그 안에 공통적으로 인간 조셉으로서 갖는 본질은 내놓지 않아야 한다.


30대도 어느덧 중턱까지 올라왔다. 많은 가면들을 보면서 이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면들 사이의 나는 어디로 갔는가. 그 속에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나를 찾았다. 글을 쓰며 내 안에 있는 ‘바보’, 자라지 못한 아이 하나를 찾았다. 요 몇 달간 바보를 부지런히 키웠다. 놀아 주고, 영양분도 공급해 주고,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놀이터도 제공해 주었다. 아직 요 꼬맹이가 장성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그래도 꽤 컸다. 그동안 쌓아 두었던 가면을 다 버리고 다른 가면으로 바꾸었다. 겉보기엔 거의 비슷한 가면처럼 보인다. 실수로 다른 가면을 쓰고 나가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바꾸지 말아야 할 것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제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을 세상에 잘 맞추면 영리한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 그들이야 말로 제일 바보이기 때문이다. 정말 바보 같은 사람, 좀 다르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보가 세상을 바꾸어 놓고, 바보의 글이 단 한 두 명에게라도 좋은 영향력을 주는 글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답게 살 것이다. 타인이 살았어도 별반 다를 것 없었을 인생 말고, 나만이 살 수 있는 인생을 살 것이다. 글도 바보 같은 사람이 쓰는 글을 쓰고 싶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글일지 모르나,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인생이 무엇인지, 그런 글이 뭔지는 살아 봐야 알 것 같고, 써 봐야 알 것 같다.


요즘은 자기가 있는 사람이 좋다. 모범 답안을 암송하는 대화보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가 좋다. 체면도 없고 부끄러움을 도 모르는 것 같아도 그 순도 높은 진실함이 좋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듯, 자기 마음속의 바보를 잘 꺼내 놓는 사람이 좋다. 그들과의 대화가 즐겁고, 그들의 글이 즐겁다. 바보들에겐 활력이 있다. 그리고 바보들끼리는 통하고, 바보가 아닌 사람도 바보에게 끌린다. 이런 부류들이야 말로 인생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이다. 브런치에는 내가 좋아하는 바보 작가님들이 많다. 조용한 시간을 골라 글을 읽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며칠간 글이라곤 발행하지 않았다. 오늘은 글을 한 편 발행해 봐야지. 마음을 먹고 첫 문장을 썼다. 거기서부터 생각이 이어져 왔다. 하나의 글엔 하나의 주제를 담아야 한다고 하던데, 다시 읽어보니 좀 뒤죽박죽이기는 하다. 그래도 왠지 이 글을 발행하고 싶다. 이로써 바보짓을 하나 더 추가한다는 마음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추석 인 더 포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