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과 인생

퇴사 4개월 차, 정산

by 정필

“최종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두 번째 직장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직장이 주는 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을 받는다. 첫 번째 직장에 들어갈 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직장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다만 어디엔가 소속되어 내 밥숟갈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급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무엇이 있는지 별로 생각지 않았다. 지나온 인생을 마구 뒤적여 무엇이라도 내다 팔 수 있을만한 것은 다 자루에 담아 시장에 내놓았다. 어디에선가 나를 사 주었지만, 나 스스로 내다 판 자루에 팔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삶을 흉내 내듯 살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용물은 채우지 못한 채 껍데기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잘못 들어선 길을 정정하기 위해서는 멈춰야 했고, 되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길을 찾아야 했다. 빨리 완주하는 것이 목표인 마라톤 경기에서나 속도가 중요한 것이다. 마라톤인 줄 알고 한참을 달렸더니 결승선에 가까워질 때쯤 사실은 마라톤 경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보다 더 섬뜩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체력은 모두 소진했고, 돌아갈 힘도, 시간도 남아있지 않음을 안다면, 열심히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비극으로 끝난다면 그보다 더 큰 후회가 어디 있을 것인가.


삶을 찾기 위해서 직장을 나왔다. 무작정 자루에 구겨 넣고 팔아버린 내 꾸러미를 다시 받아왔다. 잠시 멈추었다. 멈추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멈추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기왕 목적지가 없는 바에 일단 현 상태를 유지하며 돈이라도 버는 일이 매우 합당한 말로 들렸다. 일을 하면서 생각을 해라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다 그런 것이라는 마치 인생을 모두 안다는 듯한 가르침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라고 결정지은 바에야 계속 이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겐 잠시 멈추는 것이 또 다른 길의 진입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직장에서 나왔다. 내게 필요했던 건 타인의 경험을 답습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만의 인생을 찾아내 살아 보이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쓰고, 읽었다. 곧 다음 직장으로 출근하게 되면 지금만큼 쓰고 읽는 시간에 할애할 시간이 줄어들 테니 한번쯤 결산을 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브런치 글 63편

- 블로그 122건

- 노트 2권

- 율리시스 앱 (30만 자)


4개월이 조금 더 된 130일 정도 되었다. 매일 아침 책상에 앉아 의식 저편에 있는 나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며 쓴 글, 읽은 내용에 대한 코멘트, 독서 노트, 책을 써 보겠다고 써 둔 글, 내 안에 이만큼 많은 말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퇴사하면 그간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하게 된다고 하는데 내게는 내 안에 갇힌 말들을 풀어 주는 것이 큰 염원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장소가 주는 설렘, 여행이 주는 신선함 보다 내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대화했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미미하다. 체중이 조금 는 정도지만, 체중계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변화이다. 다만 내면의 변화가 큰 것 같다. 삶이 조금 더 단단해졌고, 희미하게 군중 속에서 존재했던 ‘나’가 더 뚜렷해졌다. 글이라는 평생의 동료이자 나의 분신을 얻었다. 잠시 멈추지 않았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들이다.


4달간 열심히 썼고, 부지런히 읽었다. 도서관 대출 목록과 최근에 구매한 서적들을 쭉 살펴 목록을 적어보니 100여 권 정도 되는 것 같다. 도중에 덮어버린 책도 있지만, 대체로 즐겁게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게 되었고, 그들을 거울삼아 나를 보게 되었다. ‘나’를 찾기 위해 고민했던 선배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찾아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한 두 문장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생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 거나, 한 번도 삶 앞에 직면하여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껍데기를 갖춰 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사회적 표준을 따라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게 있는 인생은 대체 무엇인가 고민하고, 삶의 끝을 생각할 때 그 질문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의 친구 ‘글’과 함께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글을 차곡차곡 써 내려가볼 생각이다.


이제 오전에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오늘은 무슨 글을 써 볼까 하는 시간을 당분간 갖기 어려울 것이다. 4개월간의 퇴사자 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한번 정산하고 가야 하리라 생각이 들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 4개월은 읽고 쓰는 일의 연속이었으므로 그것만으로 정산해 보았다. 글을 잘 썼는가는 논외로 하고, 일단 글이 남았다는 사실에 의의를 둔다. 그리고 내 안에 나오지 못했던 말들이 자리를 찾았다는 점에 의의를 둔다. 130편가량 글을 발행했고, 30만 자 가까이 썼고, 손으로도 300페이지쯤 되는 글을 썼으니 나는 합격점을 주고 싶다. 앞으로도 매일 쓸 것이다. 내 삶이 지나간 곳에는 글이 남을 것이며, 내 삶은 두 번 세 번 사는 인생이 되도록 하고 싶다.


처음 글짓기로 칭찬을 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끄트머리>라는 주제의 글이었다.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끝과 시작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끄트머리라는 주제로 글짓기를 했다. 모든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끝에는 항상 정산이 있다. 작게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길게는 인생 전체가 될 수도 있으리라. 언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끝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끝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금을 사는 것이 인생의 지혜가 아닌가 싶다.


아래는 4개월간 읽은 책 목록이다. 소화가 안된 책도 많고, 읽다 만 책도 있다. 그래도 책 목록을 쭉 나열하고 보니 관심사가 보이는 것 같다. 무슨 책을 읽는지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고, 나는 내가 읽은 것으로 이루어진다고도 하는 말이 과연 맞는 것 같다. 주로 글쓰기 관련 책, '나다움', 문학소설, 이런 것들을 많이 찾아 읽었다. 글이 있는 세상에 살 수 있어서 참 좋다. 내 생각과 글은 앞서 살다 간 작가들이 남겨준 글과 동시대 수많은 분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읽고 쓸 수 있어서, 글로 남겨둘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다.


1. 글쓰기에 진심입니다.

2. 스마트 브레비티

3. 조용한 퇴사

4. 좋아하는 일만 하며 재미있게 살 수는 없을까

5. 1인 출판사 수업

6. 내 삶의 글쓰기

7. 회장님의 글쓰기, 대통령의 글쓰기

8. 나에게서 구하라

9. 보통사람 강사되기

10.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1. 죄와 벌

12. 데미안

13. 수상록

14. 이방인

15.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16. 나답게 살기 위한 글쓰기

17. 모모

18. 페스트

19. 유혹하는 글쓰기

20.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

21.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22.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23. 싯다르타

24. 달과 6펜스

25. 끝없는 이야기

26. 쓰기의 말들

27. 나는 왜 쓰는가

28.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

29. 그리스인 조르바

30. 생각의 탄생

31.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32. 노동의 새벽

33. 강원국의 글쓰기

34. 변신

35. 돈

36.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37. 연필로 고래 잡는 글쓰기

38. 황홀한 글감옥

39. 오직 두 사람

40. 최선의 삶

41. 살인자의 기억법

42. 내가 일하는 이유

43. 도시의 시간

44.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5. 팡세

46. 내 마음의 안중근

47. 하얼빈

48. 한국의 명수필 1-2

49.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50. 천로역정

51. 실낙원

52. 인간 실격

53. 사람만이 희망이다

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55. 내 젊은 날의 숲

56. 반항하는 인간

57. 톰 소여의 모험

58. 하프타임

59.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6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61. 면도날

62. 빙점

63. 독고준

64. 월든

65. 죽음의 수용소에서

66. 익숙한 것과의 결별

67. 사자같이 젊은 놈들

68. 스마트 라이팅

69.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70. 너의 하늘을 보아

71. 탁월하게 나답게 사는 삶

72.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73. 이 땅에 태어나서

74.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75. 소유냐 존재냐

76.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 자기 관리론

77.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How will you measure your life?)

78. 그냥 하지 말라

79.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80. 다시,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81.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82.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83. 왜 리더인가

84. 왜 일하는가

85. 메멘토 모리

86.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87. 마음 가는 대로 해라

88.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

89.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90. 나는 이제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

91. 리추얼

92. 정리하는 뇌

93. 홍정욱 에세이

94. 챗 GPT와 글쓰기

95. 일 잘하는 사람, 일 못하는 사람

96.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2,3권

97. 소설가의 각오

98.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99. 소송

100. 위대한 개츠비

101.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저는 이제부터 바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