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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Nov 06. 2023

진짜 나와 만나는 방법

훈련장에서 글쓰기_2

나이대가 비슷한 남자만 300명이 모이는 곳이 있다. 바로 예비군 훈련장이 그곳이다. 대한민국 남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진다. 사람마다 입대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한 나이에 군인이 된다. 병역의 의무를 마친 다음 해부터 또 8년 간 예비군 훈련을 매년 받아야 한다. 7,8년 차는 따로 훈련이 없지만 그전까지 6년간은 병역의 의무로부터 예비군 훈련까지 한 그룹으로 묶여있게 된다. 늦게 입대한 나는 예비군 5년 차인 지금까지 이 그룹에서 꽤나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해 있다. 나와 비슷한 삼십 대도 있겠지만, 대부분 이십 대 초반에 군인이 된다고 가정하면 예비군 훈련을 마치는 6년 차까지도 서른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 내 주변에 모인 군인 아저씨들은 대부분 20대일 거라는 말이다.




5년 차의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앞두고 나는 어제부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전처럼 글 쓸 시간을 못 내고 있었는데, 훈련장에서 짬짬이 글을 쓸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들과 상황이 자주 연출되기 때문에 글감 또한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비상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예비군 신분으로 훈련에 참석하여 글 쓸 생각이나 한다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훈련에는 모범적으로(?) 참여할 것이니 너무 뭐라고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나는 계속 들떠 있었다. 틈나는 대로 읽을 만한 책도 주머니 사이즈에 꼭 맞는 것으로 한 권 골라 챙겨 넣었고,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글을 못 쓰게 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손에 꼭 들어오는 노트도 한 권 챙겼다. 훈련장에서 책 읽고 글 쓸 생각에 들떠있는 나 자신이 조금 웃기기도 하고, 아주 많이 스스로가 관종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확인 차 물어봤다. "거기 가서 책 읽고 글 쓰면 좀 관종인가?" 아내의 대답이 걸작이다. "자기 원래 관종이잖아." 피식 웃고 만다. 할 말이 없다. 맞다 나는 관종이다. 그래도 이 시간을 적극 선용하지 않을 수 없기에, 어쨌든 나는 읽고 쓸 나만의 도구를 다 챙겼다.


모름지기 훈련이라 하면 약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높은 훈련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될 텐데, 나는 너무 들떠있었다. 시간이 생겨서 즐거웠다. 출근 시간보다도 조금 더 빠른 시간에 싱글벙글 차를 몰아 출발했다. 글을 쓸 거라는 기대로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까. 절반쯤 가고 있는데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아차, 큰일이다.' 주머니 속에 두둑이 담아 둔 책과 노트가 왠지 뻘쭘해졌다. 급히 차 안을 뒤적여 보았지만 내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일찍 가 봤자 입소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집으로 돌아갔다가 가기엔 시간이 간당 간당 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일단 차를 돌리고 열심히 돌아갔다. 웃음이 픽 났다. 글 쓰는 게 뭐라고 이렇게 들떠서 신분증도 놓고 왔나 싶었다. 되돌아가는 길은 다행히 막히는 구간이 아니었다. 일찍 나와서 시간 여유가 꽤 있었던 덕에, 무사히 신분증을 챙기고 입소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간밤에 내린 많은 비와 아직도 불고 있는 강한 바람 덕에 오늘 교육은 실내에서 진행된다는 공지가 나왔다. 글쓰기에 최적의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 실내에 300명가량 모인 군복 입은 남자들의 체취가 좀 갑갑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기에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


입소는 9시까지였으나 교육은 10시부터 진행 예정이었다. 막간을 이용해 글을 쓴다. 뭘 쓰고 싶은지, 주제가 명확한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글을 쓴다기보다, 씀 자체가 목적이 된 것 같다. 써내려 가면서 나는 점점 선명해지고, 내 인생은 하나하나 의미를 갖게 된다. 내게 글쓰기는 투명한 '나'라는 사람에게 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그리고 오래 껍데기에 둘러 쌓여 있던 나의 진짜 모습과 호흡하는 일이다. 목적도 없고, 미리 짜 놓는 개요도 없지만 내게는 단 한 가지의 글쓰기 철칙이 있다. '진실되게 쓰자'의 단 한 가지이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도 없고, 미려한 필력도 없다. 다만 진실되게만 쓰자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진실이 무엇인가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너무도 바쁜 사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게으르게 살아온 탓인지 알 수 없지만 글을 쓰기 전에는 나조차도 나를 잘 알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겹겹이 쌓인 마음의 포장지는 너무 두꺼워져서, 내 마음으로 가는 길은 각종 가면과 사회적 요구, 표준 같은 것들로 막혀 버렸다. 깊이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잡동사니며 포장지로 내면으로 가는 길이 막혀 버려서 내 소리는 울림이 없었다. 명언을 주워 담고 훌륭한 이들의 삶을 흉내 내려 해 보아도 내 속의 울림통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깊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막혀서 질식 직전이었을까.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나도 모르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상한 취미 같은 게 아니라 절박함으로 펜을 움켜쥐고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쓰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겹겹이 가면으로 쌓여 나조차 내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때로 가면이 필요하기는 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나는 너무 많은 종류의 가면을 장시간 착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쓰고 또 쓰면서 가면 너머의 나의 모습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었다. 결과가 중요한 사회를 살기 때문에 티가 안나는 글쓰기는 얼핏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글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애써가면서 글을 쓰고 있나 보다. 출근 전 바쁜 시간을 떼 내어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마치 무엇에 쫓기듯이 써내려 가고 훈련장에 와서도, 이동 중에도 틈만 나면 쓸 수 있는 틈이 있을까 생각한다. 근무 중에는 줄글을 쓸 수 없음이 아쉬워 내 핸드폰 메모장과 노트에는 글감이 찾아온 순간이 여러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글쓰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겠다. 지금 아는 것은 글을 쓰며 나는 점차로 단단해져 가고 깊어져 간다는 것이다. 성숙한 한 인간, 그리고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 지금 쓰는 이유이자 목적인 듯하다. 써내려 가다 보면 또 다른 길을 만날 것이고, 그때그때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길에 들어서게도 될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내가 걸어온 인생길이 나라는 사람이 될 것임을 믿는다. 글은 내게 나침반이다. 좋은 동료이자 코치이며 선물이다. 글과 함께 사는 인생이 즐겁다. 조정래 선생님이 말씀하신 황홀한 글감옥이 이런 것일까 아주 어렴풋이 맛보는 듯도 하다. 아마 나도 사는 동안 벅차게 즐거운 감옥 속에 살게 될 것 같다.


훈련장의 풍경 같은 것을 쓰려고 했는데 또 글은 내게로 흘러 왔다. '씀'은 어디에서 시작하든 내게로 돌아와 나를 끌고 지면으로 나온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무엇을 쓰든 나는 더 깊어지고, 내 안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쓸 것이 없다 느껴져 글쓰기가 어렵다면 주변에 보이는 그 무엇에 대해서라도 쓰기 시작하면 된다. 그 글은 결국 내게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하여 쓰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무엇일 테니 말이다. 쓴다는 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쓰는 일 그 자체뿐이다. 나는 그 어떤 사람이든 씀으로써 자기에게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글을 공개하고, 좋아요를 많이 받고, 호평을 받는 일, 심지어 글이 책이 되고 인세를 받는 일이나 강연자가 되고 작가가 되는 일도 글쓰기 자체보다 결코 중요하지 않다. 쓰는 일만이 중요하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에게는 무수한 요청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재미있는 미디어도 참 많다. 시간은 다 조각나 있어서 앉아서 줄글을 쓸 틈이 없다. 그래도 글을 한 번 써보면 어떨까. 글은 내게 관심을 갖는 일이다.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이 아닌 내가 되는 길이다. 글 외에도 좋은 수단이 많겠지만 글만큼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단 한 줄이라도, 정직한 나를 그대로 써 보는 건 어떨까. 최근 보았던 영화 <THE WHALE>의 한 구절을 옮겨 본다.


"These assignments don't matter.

This course doesn't matter.

College doesn't matter.

These amazing, honest things that you wrote,

They matter."


"이 과제물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수업도, 대학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써낸 이 놀랍고도 정직한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진 출처 : www.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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