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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Dec 02. 2023

이름 이야기

내 이름은 명제이다. 한자로는 새길 명(銘), 차례 제(第) 자를 쓴다. 삼 남매 중 둘째였던 아버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둘째였지만 첫째가 여자 형제였으므로 장남이 되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장남의 아들, 장손이 태어났으니 뛸 듯 기뻐하셨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낳으실 무렵이 되어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지어주겠다며 이리 저리로 알아보고 다니셨던 것 같다. 내 이름은 두 개 후보로 압축되었다. 물론 할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것은 아니고, 어디 작명소에 가서 돈을 주고 선택지를 받아왔다고 한다. 


첫째 후보는 상벽이었다. 아침마당이라는 TV프로그램을 꽤 오랫동안 진행했던 아나운서와 같은 이름이다. 이유는 ‘상’ 자가 돌림자였다는 것 외에 잘 모른다. 상벽이라는 이름은 돌림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강력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 의해 거절되었다.


두 번째 후보가 지금 이름이 되었다. 한자를 단순 풀이하면 ‘차례를 새긴다.’는 뜻인데, 한참 클 때까지도 그 뜻을 잘 모르고 지냈다. 한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라는 것 정도만 알았을 따름이다. 중학생 즈음이 되어 한문 시간에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고 뜻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하게 되었다. 


“새길 명, 차례 제니까 차례를 새긴다는 뜻 아닐까요.”


한문 선생님은 나의 1차원적인 대답을 듣고는 웃으시며 뜻을 풀어 주셨다. 내 이름은 ‘차례를 새긴다.’는 뜻 외에 과거시험의 장원급제자 시험지 위에 찍는 도장에 새겨진 문구라고 하셨다. 과거시험을 치르고 난 후, 채점을 완료한 다음 순위별로 시험지를 쌓아 올리고 제일 위에는 장원 급제자 시험지가 올라온다고 하셨다. 바로 그 시험지 위에 찍히는 도장이 ‘명제’라고 하셨다. 멋진 뜻풀이였다. 


다만 철부지 중학생인 내게는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선생님이 지어낸 이야기 같은데.’ 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 글을 쓰며 한문 선생님의 지식이 과연 맞는가 찾아보려 여기저기 뒤져보았지만 나오는 데가 마땅치 않다. 인터넷에 이름 뜻을 풀어주는 유료 서비스를 이용해 보아도 한문 선생님이 풀어준 것과 관련한 내용은 없었다. 언젠가 진위를 확인할 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장원급제에 관련한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워도, 나는 내 이름이 참 좋다. 나라는 사람이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다. 같은 이름이 많이 없는 것도 좋다. 주변에 ‘재명’이나, ‘명재’ 같은 이름은 몇 번 보기는 하였으나 나와 정확히 같은 이름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희소한 이름을 가진 만큼, 나라는 사람도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져 기분이 좋았다. 이름 뜻처럼 장원급제하는 정도까지 학업적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부에 꽤 재미를 붙여 보기도 했었다. 


이름에 대해 한참 생각하다 보니, 내 이름을 가장 많이 말했던 사람은 누굴까 떠올려보게 된다. 아마 우리 엄마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철학관에서 거금(?)을 들여 이름을 지어오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그보다 더 긴 기간 중에 한두 번 볼까 말까였으므로 아마 자주 부르지는 못하셨을 테다. 엄마는 자신의 몸으로 나라는 사람을 낳으시고, 할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으로 ‘나’라는 사람을 명제라고 불렀다. 


갓난아기에게 이름을 불러 주는 젊은 엄마를 떠올려 본다. 내 몸을 통해 나왔지만 세상에 없던 새 생명, 이름을 불러 보며 엄마는 내게 점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이름에 사랑을 담아 부르고, 곧 나라는 사람이 그 이름과 함께 어울려 나와 그 이름이 하나가 될 때까지 부지런히 불러 주었을 것이다. 이름을 지어온 것은 할아버지지만, 이름을 내 것이 되게 해 준 사람은 엄마인 것 같다. 


엄마는 열심히 나를 불렀을 것이다. 엄마라고 말하는 내가 신기해서 내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을 것이다. 아빠가 일하러 간 후에 나와 남아서 말 못 알아듣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위험한 거라도 만질라 치면 늘 불렀다. 가끔 엄마는 못하는 술을 한두 잔씩 마시고 와서는 내 이름을 불렀다. 갓난아이 시절부터, 사춘기 소년에서 지금 삼십 대 청년에 이르기까지 엄마는 부지런하게도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지금도 엄마는 전화를 하거나 대화를 할 때면 내 이름을 부른다. 편지를 쓸 때도 내 이름을 써 준다. 살아온 삼십 여 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니 엄마가 나를 부르는 음성과 함께 나라는 사람도 함께 지어져 온 것 같다.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음성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또 다른 목적을 위해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회사에서 가장 많이 듣는 ‘명제 씨,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 라거나, ‘명제 씨, 어제 말씀드린 거 언제까지 가능해요?’ 같은 요청의 목소리가 아니다. 엄마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일 것이다. 


부르고 또 부르는 그 이름과 함께 나는 이름이 되어갔고, 이름은 점차 내 것이 되었다. 앞으로 장원급제할만한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점점 더 내 이름에 딱 맞는 사람이 되어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 본다. 그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낯설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의 태어남을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과 그를 양육했던 사람의 마음이 함께 들어 있는 것 같다. 또 그가 자라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들어있다. 이 마음들이 한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의 인생을 채우고 있는 것이리라. 이름 속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름도 인생만큼 고유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상대에게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을 인식하게 되고 상대방은 내게 의미를 갖게 된다. 


국민 자기 유재석 님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것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재석 님은 한 번 만난 사람의 이름도 잊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누구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불러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고유한 존재로 알아준다는 것이다. 호칭이나 직책도 좋지만,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줌으로써 그 사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내 세계 속에 함께 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싶다. 이는 나 또한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며, 내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만나는 사람을 성별로만 구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남자와 여자로만 구분되는 세계는 해상도가 엄청 낮은 세계일 것이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도 식별하기 힘들 만큼 뿌연 세계가 아닐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른다는 것은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 그리고 각 존재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겨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타인이 나를 볼 때, 나를 고유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그냥 ‘남자’로 여긴다면 나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거나 기껏해야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나는 나와 함께하는 존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고 싶다. 한 명 한 명 의미 있는 이름, 그만이 가진 고유함으로 부르고 싶다. 조금 품이 들겠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그 사람 한 명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앞에 앉아 있는 아내의 이름을 불러 본다.


“이름이 참 예쁘네.”


아내는 별 대답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대꾸한다.


어디선가 또 본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은 그 어느 말보다 달콤하게 들린다고 한다.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는 건 어떨까.


사진 출처 :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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