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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Oct 07. 2023

세 종류의 시간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요 며칠 꽤나 서늘해진 공기를 맞다 보니 뜨뜻한 탕에 몸을 좀 담그고 싶어졌다. 어릴 땐 아빠 따라 목욕탕 가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 내 피부도 좀 두꺼워진 것일까. 뜨거운 탕에 저벅저벅 들어가면서 “으어, 시원하다.”를 연발하던 아빠가 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서늘한 공기 맞으며 아침 운동을 마친 후에, 사우나로 향했다. 몸을 씻고 온탕에 몸을 담갔다. 뜨거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시원하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뜨거움과 따뜻함 사이 어디쯤인 것 같다. 


뜨뜻한 물이 그립니 어쩌니 해도, 사실 나는 탕에 그리 오래 있지는 않는다. 탕에 몸 좀 담그고 씻고 해도 1시간이면 족하다. 더 어릴 때는 탕에 몸 담그러 갔다가 15분 만에 나온 적도 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아내가 1시간 30분을 제안해 왔다. 오래 못 있는 나를 위해 최대한 빨리 나오겠다는 뜻이었다. “한 시간 반이면 되겠나?” 재차 확인한 뒤 각자 탕으로 향했다.


어른들은 뜨거울수록 시원하다고 느끼는 것인지, 열탕에만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온탕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 참 안 간다. 시계만 한참을 쳐다보고 있다. 15분이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티비도 없고, 말동무도 없고, 쳐다볼 핸드폰도 없으니 탕 속에서의 15분은 참 길었다. 같은 시간이라도 뭘 하고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빠르게도 가고 느리게도 간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따라 활동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첫 번째 활동은 정말 지루한 일이다. 군 복무 시절 야간 초소 경계 근무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만 명 중에 한 둘 쯤은 혹시 간첩이나 적군이 침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두 시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근무를 서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간이 너무 길게 여겨졌다. 드라마에서 경계근무 서는 장면을 묘사할 때면 늘 “재밌는 얘기 없냐?”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 활동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 시간 속에서 사람은 지루함을 느낀다.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린다. 시계만 바라본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은 제일 느리게 가는 부류이다. 한참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시계를 보면 2분 정도 지난 끔찍한 경험이 몇 개쯤 떠오른다. 


두 번째 활동은 좀 느리게 갔으면 하고 바라는 일이다. 몰래 먹는 간식이라고 해야 할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자꾸 유튜브에 눈이 가는 것이다. ‘이것만 보고 공부해야지.’ 한다. 15분, 20분짜리 동영상은 부담스러우니 누르지 않지만 5분, 10분짜리 영상은 한 두 개쯤 눌러서 본다. 한 두 개쯤 영상을 보다가 ‘아 공부해야 하는데.’ 하며 시계를 보면 애매한 시각이다. ‘30분 되면 해야지.’, 하거나 ‘정각되면 해야지.’ 하며 이제는 더 짧은 동영상을 몇 개 본다. 근데 시간은 어찌나 빠른지, 끄기로 한 시간이 되어도 처음엔 잘 끄지 못하고 시간을 넘기기 일쑤이다. 이런 시간은 빗나간 시간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는 것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다. 마땅히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눈을 돌리는 시간이다.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이다. 그렇지만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 시계 보는 빈도로 치면 첫 번째 종류만큼은 아니지만 꽤 자주 본다. 첫 번째 부류의 활동에서 시간이 굼벵이 기는 속도로 지나간다면, 이 부류는 시간이 꽤 빨리 흐른다. 


세 번째 활동은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는 시간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 완전히 몰입한다. 해가 뜨는 시간에 일어나 자리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는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작업은 계속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쓰기에 몰입하고 있는 작가, 저녁 먹을 시간이든 학원 갈 시간이든 아랑곳 않고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 아니면 골몰히 뭔가 생각하느라 배고픔도 잊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부류의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마치 시간의 흐름 바깥에 존재하는듯한 인상을 준다. 분야를 막론하고 이런 사람들은 늘 있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빨려들 듯 읽은 책 한 권, 해 지는 것도 모른 채 나누던 즐거운 대화, 퇴근시간이 된 줄도 모르고 일에 열중한 경험 등. 여기서는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듯 지금 하는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으며,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활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빠른지 느린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몰두한다.


탕 속에 앉아서 초침이 움직이는 것까지 관찰하고 있으려니 내게도 다양한 종류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는 것은 곧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 세 번째 종류의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은 더 풍요롭고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든, 가면 안 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아까워 하든,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몰두하든 어쨌거나 시간은 흐른다. 내게 허락된 시간을 모래시계에 비유해 본다면, 뒤집힌 모래시계의 위쪽 부분이 거의 남지 않게 될 때에 내 삶을 돌아보게 되겠지. 그때, 그래도 세 번째 부류의 시간을 많이 보냈노라 여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군대에서처럼 부득이하게 시계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시기가 있겠지만, 아마 이제는 그런 시간을 맞으면 글을 쓰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바라기는 탕 속에 앉아 있을때를 빼면 시계만 바라보고 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 두가지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수 있는 일이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어차피 시간은 갈 것이다. 이왕 사는거 푹 빠져 살아가리라 다짐을 새롭게 해 본다.


한 시간 반을 약속했지만, 삼십 분 일찍 나와 핸드폰을 꺼내 들고 몇 자 적어본다. 한참 쓰다 보니, 저기 아내가 덜 말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어 나온다. “여탕은 드라이어 쓰려면 동전 넣으라 하더라, 선풍기로 말리다가 늦었다.”며 웃어 보인다. 어라, 그러고 보니 만나기로 한 시간에서 20분이나 더 지났다. 일찍 나왔는지 묻는 아내에게 "아니, 방금" 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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