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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Nov 28. 2023

안 써지는 날

그래도 씁니다.

좀비가 된 기분이다. 본능만 남아 있는 좀비가 된 말이다. 사람을 물어뜯고 싶은 건 아니다. 굳이 상상해 보자면, 글 쓰고 싶은 본능만 남은 좀비 쯤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글쓰는 좀비라니, 약간 기괴하긴 하다.


글을 쓰고 싶어서 오늘을 따로 떼 놓았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다 보니, 예전만큼 글 쓸 시간이 부족했다. 고심한 끝에, 일주일에 이틀은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집에서 해도 되지만 좀 더 몰입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따로 시간을 떼 놓았다. 오늘을 놓치면 이틀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루종일 너무 분주했다. 처음 해보는 일을 동시에 여러 가지 진행하다 보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 각 과정마다 의견조율과 보고 과정이 수반되어야 했다. 스스로 결정해서 진행할 수 있는 일이면 그나마 덜 분주했을 텐데,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으니 두 배, 세 배는 분주한 기분이 들었다. 퇴근 직전까지도 회의를 했다. 글 쓰러 떠날 시간이 되어서도 마음은 분주했다. 대차게 분주함을 뒤로한 채 글쓰기를 향해 떠나 왔다.


그런데 글이 안 쓰인다. 쓰고 싶은데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은데 쓸 내용이 없다. 게다가 차를 한 잔 마시며 우아하게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유혹도 생겼다. 쓰지 않고 읽으려 하는 마음은 내게 있어 언제나 고상한 이유가 된다. 마감해야 하는 글도 없고, 글을 쓰라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다. 계속 안 써도 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어차피 쓸 것도 없잖아.’

‘지금 안 써도 되잖아, 다음에 쓰자.’

‘차 한 잔 마시면서 독서하는 건 어때?’


아, 근데 이걸 어쩌나. 글이 쓰고 싶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웃기는 상황이다. 분주한 마음은 뒤죽박죽 되어있고, 쓸 내용도 콕 집어 하나를 집어내기 힘든 상황이다. 하루 종일 에너지를 써버린 탓에 머리가 좀 멍하기도 하다. 왠지 맑은 정신이 아니면 글을 써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때를 틈 타 공격이 들어온다. 검열관 녀석이다. ‘멍한 상태로 아무 글이나 쓰려고?, 그런 글은 안 쓰느니만 못해.’ 이 녀석은 자꾸 나를 유혹한다. ‘꼭 오늘 쓰지 않아도 되잖아?’, ‘천천히 해, 괜찮아.’


맞다. 검열관인지 뭔지 하는 녀석의 말이 다 맞다. 아직도 마음이 분주한 것도 맞고, 글을 쓰고 싶어서 앉았는데 한편으로는 글을 쓰기 싫기도 하다. 머리가 멍하다. 이 상태로 글을 쓰면 둔필이 더더욱 둔필이 될까 싶은 두려운 마음도 있다. 누가 내게 글을 써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늘까지 써야 하는 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구구절절 이 검열관 녀석 말이 다 맞다. 그래도 나는 지금 똥고집을 부려보고 있는 중이다. ‘모르겠고, 그래도 쓸래.’ 


이제 이 녀석은 전략을 바꾸었다. 유혹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바꿨다. ‘야, 뭐 그리 대단한 글을 쓴다고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어?’ 이건 좀 세다. 그래도 금세 방어한다. 대단한 글이 아니면 어떤가? 글 자체가 대단하고 말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록 내 글이 별 대단한 것은 못 된다 하여도, 나는 내 글을 대단하게 여길 것이다. 이 대단치 못한 글을 쓰기 위해 퇴근 직후 따로 시간을 떼 냈다.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지만 틈만 나면 글을 쓸 생각을 한다.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도 꾹 참고 입을 닫고 글을 쓴다. 글이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내 글은 대단하지 않을지라도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검열관 녀석의 눈에 차는 글은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정성스럽게 쓰는 행위를 이어갈 것이며, 내 인생이라 불리는 시간을 투자하여 글을 씀으로써 내 글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계속해 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게 있어 내 글은 점차 대단해질 것이며,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더 깊은 곳까지 탐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음이 간질간질하면서 답답하다. 검열관 녀석의 온갖 방해공작 속에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 녀석의 계략을 파헤치고 있지만 노트북 뚜껑을 덮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이쯤 받아치고 나니, 검열관 녀석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자판 위를 움직이는 손이 꽤나 부드러워졌다. 좀비를 말로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합당한 이유를 아무리 갖다 대도 들어먹질 않으니 검열관 녀석도 지쳐 한 풀 꺾인 게 아닌가 싶다. 맞다. 나는 그래도 쓸 것이다. 글을 못 쓰게 괴롭히면 그걸로 글을 쓸 것이고, 글 쓰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바꾸어야 한다면 다른 시간을 버릴 것이다. 검열관도, 누구도 나를 쓰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


쓴다는 것은 곧 내가 된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글쓰기에도 ‘정답’ 이 있다고 주장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만의 정답을 만들어 가는 것에 가깝다. 글을 씀으로써 점차 타인이 만들어놓은 정답이 아닌 내가 선택한 답에 가까워져 가는 것을 느낀다. 물로 물을 희석시킨 것 같은 무색무취의 모습에서 색깔이 쨍한 한 송이 꽃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정답이 없는 글을 써야 한다. 남이 쓰라고 해서 쓰는 글, 가이드라인에 맞게 내용만 바꾸면 되는 글 말고, 나만의 글을 써야 한다.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들을 글자라는 도구로 쌓아 올려서 글이라는 한 채 집을 지어야 한다. 내 것들로 지은 집은 나만의 쉼터가 될 것이며, 타인이 찾아올 수 있는 쉼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목적 없이 글을 쓴다. 내가 되고 싶어서, 내 속에 솟는 생각들을 말로 꺼내기 위해 쓴다. 나를 표현하고, 점차 선명하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글을 쓴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지만 나는 글쓰기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글이 써지든 그렇지 않든, 좋은 글감이 떠올랐든 아니든 글을 쓸 것이다. 품이 많이 드는 데 비해 태가 거의 나지 않는 활동이 글쓰기다. 그래도 나는 이 길고 긴 과정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내가 되어갈 것이다. 자기 글을 쓰는 사람은 단단한 사람이다.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갈 힘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또 이렇게 좋을 대로 생각하고 만다. 


쉽진 않다. 글을 써 보기 전에는 뚝딱 나온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 한 장면 처럼 은은한 클래식을 배경음악으로 타자기를 두드리는 모습만 생각했다. 글을 써 보니 잘 쓰일 때도 있지만 안 그럴 때도 많다. 머리를 싸매고 쓴다. 엉덩이가 들썩이고 입술이 들썩이는걸 꾹참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입을 다물고 글을 쓴다. 글마다 투쟁의 흔적이 남는다. 둔필이라 비웃어도 좋다. 나는 이 씨름의 결과물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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