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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Nov 22. 2023

세 개가 아니라 하나인 것

선순환 구조

글쓰기에 있어 자주 언급되는 ‘3다’는 사실 하나이다. 무엇이 선 순위에 있는지는 따지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독, 다작, 다상량은 하나로 묶인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독은 글로 표현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다독의 목적은 나만의 생각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글을 읽으며 나 자신만의 생각을 갖는다. 이 생각은 나 자신이 나름대로 세상을 분석하는 눈이 되어서, 한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한다. 다상량 없는 읽기는 공허하다. 타인의 생각만을 수동적으로 답습하는 읽기를 하는 사람은 차라리 읽지 않느니만 못하다. 삶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던가. 타인의 생각만을 답습한다는 것은 자신은 없고 다른 사람의 기준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읽기와 생각하기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읽었으면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 생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기 자신이라는 필터를 거친 ‘해석본’이어야 한다. 이것이 읽는 목적이다. 바꿔 말하면, 읽는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재해석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의 읽기와 생각하기를 통해 자신만의 가치관을 갖게 되고, 인생은 점차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져 간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읽기가 ‘입력’ 위주의 활동이고, 생각이 입력된 내용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발효’나 ‘숙성’의 단계라고 한다면 쓰기는 ‘출력’의 단계이다. 읽고 생각한 내용을 자신만의 언어로 꺼내 놓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나를 표현한다는 뜻이며, 나 자신이 타인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유성을 가진 개체로 존재한다는 뜻이며, 모든 일에 대해 ‘YES’가 아닌 때로는 ‘NO’라고 말할 수도 있는 자신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읽기와 생각하기, 쓰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읽는 행위가 없으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경험은 제한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읽지 않는 사람은 새 세계를 접하고 생각의 저변을 넓힐 기회를 그만큼 잃게 되는 것이니, 아무리 넓은 세계를 지닌 사람도 지속적인 읽기 또는 여타의 ‘입력’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점차 자신이 사는 환경 안에서만 살아가는 좁은 인간이 되게 마련이다. 읽어서 다른 사람의 견해 또는 새로운 것을 간접경험하고, 거기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더한다. 입력한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버무리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 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이 되어 간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발전하는 글을 쓰기 어렵다. 읽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에 갇히게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타인의 생각을 답습하는 것뿐이니 매번 같은 글을 쓰다가 금세 글을 쓰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유를 통해 읽은 내용을 내재화하는 과정이 없이 쓰기만 하는 사람이 그 사람만의 고유한 글을 쓸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또한 아무리 읽고 생각해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출력하는 과정, 즉 쓰는 과정이 없으면 생각이 더 발전하지 못한다. 읽기와 생각하기 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만들 수 있지만 글을 쓰는 과정이 없으면 생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착상 상태에 머물게 된다. 글쓰기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생각을 발전시키는 도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쓰면서 읽고 생각한 내용을 점차 고도화한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텍스트는 쓰는 사람의 고유한 생각으로 변화하고, 이 과정이 축적되며 한 사람의 사고가 확장되고 견고해진다. 쓰기의 선순환 구조는 이렇게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다독, 다작, 다상량을 글쓰기의 핵심 요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글쓰기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신없이 바빠 생각할 시간이 없는 현대인에게 생각하는 인생을 선물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세 요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읽는 사람은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글의 형태로 꺼내고자 한다.


바쁜 것이 미덕인 사회이다. 무엇을 한 지는 알 수 없어도 하루종일 ‘무언가’ 했다면 그 하루는 꽤 괜찮은 하루였노라 평가받는 사회이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겉으로 보이는 부지런함이 실은 나태함으로 판명 나는 시대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기에 수용하기만 해도 하루종일 바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삶은 휩쓸려 다니는 삶이다. 하루 종일 바빴던 어느 하루를 떠올려 보자. 이 일에서 저 일로, 무수한 요청 사이를 떠다녔지만 하루를 반추해 볼 때 ‘나 오늘 뭐 했지?’ 하게 되는 하루가 있다. 하루가 만일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나 사는 동안 뭐 하고 살았지?’ 하게 되는 인생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게 글쓰기는 떠다니는 삶의 방식에 대한 ‘NO’ 선언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표준에 나를 맞추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글 쓰는 삶은 읽고, 생각하는 삶과 함께이다. ‘글을 쓰고 싶다.’에서 시작한 작은 즐거움을 이어오다 보니 세 가지 요소가 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쓰기는 갇힌 내 말을 꺼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어느새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만의 글을 쓰는 것과 나만의 인생을 찾아 살아내는 일은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호흡이 있는 한 글을 쓰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3다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아주 빠르고 강한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는 삶을 살지 않고 나만의 장단에 맞춰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친구이자 동료이다. 쓰는 인생은 다르게 사는 인생이다.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다. 쓰는 사람은 진정 자기 자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만나게 될 것이다. 쓰고 또 써내려 가다 보면 어떤 길을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길에서 만나는 나야말로 내가 바라던 인생일 것이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내가 기대된다. 바라던 내가 된다는 것, 생각만으로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쓸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나를 꺼내어 놓고, 글로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감사하다. 글 쓰는 선순환의 세계에 함께하는 벗이 점차 많아지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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