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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Dec 16. 2023

글쓰기 생각

토요일은 글 쓰는 날이다. 아내와 함께 풍랑 경보가 발효된 제주 어느 바닷가 카페에 앉아 있다. 카페 건물은 두꺼운 외벽의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서 바람이 칠 때마다 안으로 차가운 해풍이 스며드는 듯하다. 내리는 비는 컨테이너 골조로 된 건물을 때리며 쏴아 하는 소리를 낸다. 매서운 휘이잉 바람소리와 가느다란 비가 세찬 바람에 실려와 컨테이너 건물 외벽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창밖 멀리 보이는 바다에는 성난 파도가 바닷물을 뒤집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소한 맛 조금, 쓴 맛 조금, 기름기 조금 섞인 따뜻한 커피를 홀짝인다. 빗소리와 어우러져 들리는 카페 매장 안의 재즈 음악이 한 주간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듯하여 한껏 이완을 즐겨 본다. 


토요일 오후에 마시는 따뜻한 한 잔 커피가 좋다. 이 커피의 또 다른 이름은 여유로움이다. 글을 쓰기 위해 카페를 찾았지만 커피가 식기 전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따뜻한 커피는 바로 음미하지 않으면 금세 식어버리기 때문에 허겁지겁 글을 쓰며 마시는 둥 마는 둥 해서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너무 뜨겁지 않아 바로 마실 수 있게 내려진 커피 한 잔을 맛본다. 주인의 친절한 마음씨가 찻잔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다. 멀리 바닷가에 파도가 치는 것도 물끄러미 바라보고, 느릿느릿 들리는 음악 소리에 눈을 감아 보기도 한다. 여전히 맛 구분은 못하지만 케냐 원두의 특별함도 입 안에 한 껏 머금어 본다. 


커피의 온도는 수명이 길지 않다. 절반쯤 마셨을까. 어느새 찻잔은 식고, 커피는 차가워졌다. 갑자기 추워지는 것 같다. 식어버린 커피를 몇 모금 더 마시고는 글을 써야겠노라 노트북을 펼쳐 한 두 글자씩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글 쓰는 시간이 정말 즐겁다. 오랫동안 끈질기게 나를 귀찮게 하던 질문도 이제는 사라졌다. ‘글 써서 뭐 할래?’ 글 써서 뭘 하지 않아도 이제 글 쓰는 편을 택해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내게 글 쓰는 행위는 그간 무언가 하기 위한 도구를 위해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는 행위 인지도 모르겠다. 수단으로써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기 위해서 현재를 희생시켜 왔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무용한 것이라 여겼다. 말로는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이야기했으나, 내 삶으로는 늘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아왔던 것 같다.


글은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행위 자체로 몰두할 수 있다. 글이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책이 되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동기는 아니다. 잘 못해도, 조금은 서툴러도, 별 결과가 나지 않아도 글은 괜찮다며 나를 독려해 주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현재의 순간에 오롯이 몰입하는 방법을 배웠고, 씀과 동시에 내 삶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몰입된 현재야 말로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쓸 수 있어서 벅차도록 감격스럽다. 글을 통해 무언가 되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지금은 ‘글’이라는 길의 종착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계속 이 길 위에 있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쓰는 인생을 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제 보아도 나는 내 인생이 참 좋을 것 같다. 


나는 그저 내 글을 써 내려가고 싶다.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는 글 앞에 붙는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저마다의 기준을 갖고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틀로 글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자에게는 사실을 정확하게 쓴 글이 좋은 글이 될 테고, 웹소설을 쓰는 겸업 작가에게는 사람들이 읽고 돈을 내서 책을 구매하도록 하는 글이 좋은 글이 될 것이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사람은 내 글을 읽고 누군가 웃으면 좋을 글이라 여길 것이고, 지식을 뽐내고자 하는 이는 자신의 지식을 그럴듯하게 써낼 수 있으면 좋은 글이라 여길 것이다. 


글이 좋아서 더 좋은 글을 쓰고자 하는 욕심에 타인의 글을 기웃거렸다. 기자 생활을 했던 분께 자문을 구하기도 했고, 소설가로 활동하는 분께 묻기도 했다. 고전 속에서 잘 쓴다는 기준을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고, 수많은 작법서들을 살피며 내 글에 적용하려 애썼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저마다 다 다르다는 점이다. 각자 기준이 다르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기준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필요에 의해서 그때그때 목적이 다른 글을 쓰기도 한다. 어떤 글이 절대적으로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은 요소를 많이 포함한 글도 있을 것이고, 뭐 그다지 훌륭한 점을 찾을 수 없는 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요소만 다 갖다 넣는다고 해서 글이 꼭 훌륭한 것도 아니다. 


내게 훌륭한 글의 기준은 진실함이다. 문법이 조금 틀려도, 앞 뒤 문맥 흐름이 이상해도 괜찮다. 다만 내 글은 울림이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거짓과 위선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글 속에는 최대한 나를 덜 포장하고 싶다. 내가 써내는 글 속에서 누군가가 ‘작가’가 아닌 나라는 사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글을 쓰고 싶다. 나의 본질, 진실에 다가가는 도구로 글을 사용하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고, 삶을 진실이라는 렌즈로 바라보기 원하는 사람들과 친구 맺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은 분류하기가 애매하다. 신변잡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전문 지식을 계속 쓰는 것도 아니다. 몇 번이나 글을 분류해서 연재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딱히 분류할 수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언젠가 때가 오면 엮어 보려는 노력은 해야겠지만, 지금으로선 분류하지 않고 뭉뚱그려 놓고 싶다. ‘나’의 삶의 여정을 엿볼 수 있도록 글로 표시해 두고 싶다.


풍랑 경보가 내려 태풍이라도 부는 듯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지금은 좀 잦아들었다.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홀짝이면서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 참 좋다. 쓸 수 있어서.


사진 출처 :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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