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s of Two Painters
1870년대 말, 여성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에 탄생한 탁월한 작품이다. 지아나 버크 (Jeanna Bauck)는 한창 작업 중인 동료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독일 뮌헨의 집이자 작업실이었던 스튜디오에서 이젤 위의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베르타 웨그만 (Bertha Wegmann)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지아나 버크가 그린 베르타 웨그만
스웨덴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지아나 버크는 고향 스톡홀름을 떠나 독일로 온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작곡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악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아함이 흐르는 작업실 가운데의 화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으로 바꿔 상상해봐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두 사람은 뮌헨에서 공부하면서 가까워졌고 이후 함께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들이 파리로 이동한 시기는 1871년 보불전쟁이 끝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풍요로웠던 프랑스의 벨 에포크 (Belle Époque)였다. 전 세계의 젊고 열정적인 예술가들이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모여들었던 것처럼 두 사람도 작가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파리행을 선택했다.
*베르타 웨그만이 그린 지아나 버크
반대로 1881년 파리의 작업실에서는 웨그만이 버크의 초상화를 그렸다. 온통 물감이 묻은 수수한 작업복, 여기저기 쌓인 캔버스와 아직 물감이 마르지 않은 팔레트에 꽂힌 붓, 선반을 타고 늘어진 넝쿨 줄기. 잠시 시간의 저편 너머로 그녀의 작업실을 엿본다. 휴식을 위해 책을 들고 앉아, 미소를 머금고 친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등을 비추며 머리카락 사이로 노랗게 퍼지는 빛이 따뜻하다. 인물화를 볼 때면 종종 내게 먼저 말을 건네는 기분이 드는 작품이 있다. 작품 속 모델과 화가가 서로에게 아주 편안한 관계일 때만 나타나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동이 교차한 순간이 그림 속에 남게 되면, 그 파동을 찾은 사람은 관계의 형상을 연상할 수 있다. 웨그만이 버크를 묘사한 방식, 그리고 그녀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선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이 느껴진다. 베르타 웨그만은 친구인 지아나 버크를 통해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상에 중류층 여성이 지닌 품위를 결부시켜, 신여성(The New Woman)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베르타 웨그만│Bertha Wegmann (1846 – 1926)
덴마크의 저명한 인물화가로 지아나 버크를 그린 위 작품이 대표작으로 소개되며, 굉장히 유명하다. 1887년 덴마크 왕립 예술대학의 첫 여성 교수로 임명되었고, Ingenio et Arti 메달(뛰어난 성과를 올린 예술가와 과학자에게 수여되는 왕실 명예 훈장)을 받은 첫 번째 여성 화가였다. 1926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죽는 그 순간까지 작품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 시기에는 많은 예술가가 그들의 친구와 동료 작가들을 모델로 많은 인물화를 남겼다. 그러나 직업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표출하기 위해 붓을 든 모습의 서로를 그린 것은 오직 여성들뿐이었다.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인정받을 수 있는 남성 예술가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가부장적 사회 구조 내에서 예술적 창조 활동에 대한 의지는 으레 남성들에게 자연스레 주어지는 권리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취미를 넘어서 예술가로 성장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바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부합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욕구로 간주되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의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인의 피나는 노력 외에도 사교 활동을 통해 맺게 되는 주류 사회의 인맥이 필요했다. 그 사회에서 그들의 동료는 물론 작품을 평가하고 심사하는 평론가들 모두가 남성이었음을 고려하면, 기회의 불평등과 성차별을 극복하고 작가로서의 역량을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세기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계층적 분화가 발생했다. (오늘날에도 특정한 형태로 이 계층 분화가 존재한다) 근대 예술사에서 '집'은 주로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여성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범위는, 빠르게 발전하는 근대 도시가 가진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공공의 영역에서 미미한 단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중류층 가정의 여성들은 자유로이 도시의 거리를 오가기 어려웠다. 여성 작가들은 작품의 주제를 탐색하고 거기에 근대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소의 이동에 제약이 없는 남성 동료들과는 다른 사회적 공간을 찾아야만 했다.
이 시기의 북유럽 여성 작가들이 그린 작품들은 그들이 작업실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고, 주로 스튜디오 내부에서 작품 활동을 영위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남성 중심의 경직된 사회 환경 속에서 스튜디오는 각자의 집이자 사교의 장이 되면서도, 붓끝으로 창의력을 쏟아내는 작업실이었다. 떠들썩하지 않게, 조용하고 내밀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작업실이라는 공간은 곧 직업 화가로서의 무대였고, 공공의 영역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에서 스튜디오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분명한 한계를 의미한다. 발코니 바깥에서 포착한 시대의 변화를 표현할 새로운 방식을 찾던 아방가르드 (avant-garde) 화파의 여성 작가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외부의 근대화에 동요하지 않고 작업실에 남아 그 안에서 스스로 구축한 세계를 그려냈다.
지아나 버크│Jeanna Maria Charlotta Bauck (1840 – 1926)
뛰어난 인물 묘사(특히 아동)로 수상 이력이 있고, 알프스를 여행하며 그린 풍경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했으며, 그녀의 작품 Woodland Lake와 Portrait of a man이 1905년 출간된 '세계의 여성화가'에 수록되었다.
참고 : Google Arts & Culture 내용 번역
*Nationalmuseum Sweden
두 작품 모두 스웨덴 국립미술관(National Museum of Fine Arts)에 전시되어 있다.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미술관은 북유럽 최고의 미술관으로 꼽힌다. 2013년부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공사에 착수하는 바람에 2014년 스톡홀름에 갔을 때 방문하지 못했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당시엔 마치 미술관 앞에서 입장 거부라도 당한 것처럼 안타까웠다. 워낙 대규모 건축 공사라서 2018년 1월 현재까지도 완료되지 않았으며, 올해 10월 드디어 재개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무려 아홉 달이 넘게 남았는데, 곧 개장한다고 기대해달란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일단 문 닫아놓고 한 번에 제대로 고칠거야' 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느리지만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지극히 북유럽스러운 행정절차가 와 닿는 멘트이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스웨덴 국립미술관이 건축과 전시 분야에서 어떤 혁신을 이루어냈을지 궁금하다.
http://www.nationalmuseum.s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