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柿图
이 작품은 13세기 중국의 선승 화가였던 목계(牧谿)가 그린 것으로, 정확히 언제 그려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살았던 남송(南宋) 말기는 송나라 최고의 문인화가들이 앞다투어 각자의 재능을 꽃피웠던 시기였다. 지금은 일본 수묵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중국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화가로서 목계가 그려낸 작품의 예술성은 당시 중국의 화풍을 이끌던 주류 계층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몽골의 탄압을 피해 많은 선승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중국에 유학와 있던 일본 승려들도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목계의 작품을 가지고 갔다. 정교함과 간결함이 동시에 깃든 그의 화풍과 기술은 선종의 종교적 이념에 영감을 얻은 일본 승려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면서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색다른 화풍은 가라쿠마시대 이후의 일본 예술사에 획기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일본의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絵)'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모네나 고흐 등이 그 영향을 받아 기모노를 입은 여인, 일본식 정원의 아치형 다리를 그린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이 시기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본 문화에 받은 충격은 그들의 캔버스에 평면적인 기법의 일탈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예술은 문화를 넘나들며 돌고 돈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화가들과 일반인들이 그의 작품을 모사하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현재 목계의 작품 3점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의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반면 중국 본토에서는 목계의 작품이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었다가, 일본에서의 명성으로 인해 근래 중국에서 그가 활동했던 지역을 샅샅이 조사해 겨우 하나를 찾아냈다고 한다. 고국에서는 먼지가 되어 잊힌 승려가 타국에서는 대화가가 되어 긴 세월 동안 사람들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이다. 천재는 시대를 타고나야 한다고 말한다. 시대를 선도하고 문화의 중추를 형성하는 예술가들의 사상이 나라마다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 시류에 따라 화가의 인생과 작품의 운명도 달라졌던 것이다.
<여섯 개의 감>은 벽에 걸어두는 족자 작품으로,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줄지어 늘어선 여섯 개의 감을 수묵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한 승려가 단정하게 앉아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만들어낸 여섯 개의 작은 일렁임. 얼핏 보기에 힘이라고는 들이지 않고 대충 소매를 쓱 걷어올리고는 붓을 두어 번 휘두르고 마무리했을 법하다.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추상화를 볼 때 분명 누군가 어린애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수묵의 농도 조절만 할 줄 알면 쉽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 하지만 우리 모두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누구나 '노력 없이'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붓을 드는 것이 다음 일과로 넘어가기 전 이루어지는 매일의 일상적인 수련 과정 중 하나여서 승려는 다른 잡다한 묘사나 기교에 마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걸까. 개개의 차이가 옅을 뿐, 한 번 지나간 승려의 붓 끝에서 젖은 종이 위로 퍼져 나온 먹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가진 감이 되었다. 선이 닿아 만들어진 형태와 면으로 덮여 구분되는 명암, 또 미묘한 질감의 차이가 더해져 물질의 정연함과 공간의 무질서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만큼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당장 그림에 손을 뻗어 매끈한 감의 촉감을 느끼고 싶거나 가까이에서 향을 맡아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흘러 붉게 익어버릴 감 중에 하나가 먼저 터지거나 물러서 저 작은 공간에서 얻는 조용한 안정이 깨어질까 걱정이 앞선다.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던 이유는 바로 그림이 응축하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자연과학적으로는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무형의 에너지가 이 작은 종이틀 속에서, 종이가 된 지 너무 오래되어 조금씩 소멸되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는 나무 섬유 한 올 한 올에 단단히 파고들어서 수백 년 동안 힘을 발산하고 있다. 비를 몰고 와 폭풍처럼 몰아치는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바닷바람 같은 그림이 있고, 풀향기를 싣고 사뿐사뿐 불어오는 싱그러운 에너지를 가진 봄바람 같은 그림도 있다. 내게 이 그림은 후자에 속하고 그 단순함이 주는 쾌활함이 놀랍도록 사랑스럽다.
그림 속의 여섯 개의 감은 맑고 순수하지만 짓궂게 장난스럽고, 한없이 멀어 보이나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자, 그럼 여기서 작가는 과연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 이런 종류의 선불교 회화는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수도에 정진하는 승려들이 하는 명상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일종의 명상 기법이라고 보기도 한다. 선종은 내면으로의 몰입을 통한 자기성찰을 위한 구도의 방법으로 명상을 중요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이 그림도 선종의 종교 예술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 자체는 어떤 사회·정치적 목적도 담고 있지 않으며 순수하게 명상 활동을 돕기 위해서 그려졌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현재 일본 교토의 다이토쿠사(大徳寺)에 보존되어 있다. 믿어지는가? 무려 8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의 승려들이 벽에 걸린 이 그림을 보며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
Wei Li
*선종(禪宗)
중국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한 조류. 한국과 일본 등지로 전파된 불교 분파로 핵심 교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선종은 모든 인간이 내면에 본래 불타(佛陀/부처)가 있다고 믿고, 수행을 통해 자기 내면에 있는 본래 불타를 발견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한다. 선종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대체로 평온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일본 여행에서 어딘가에 끌리듯 사 모았던 그림엽서가 이런 느낌을 가진 것들이 많다. 영어로는 Zen Buddhism이라고 번역되며, 근대에 들어서는 Zen Style이라는 일본 특유의 문화적 근간을 이루는 철학으로도 파생되어 순수 회화뿐 아니라 예술문화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내 공간에서의 정적인 움직임과 세밀한 동선이 강조되고, 좌식 문화와 엄격한 다도가 발달했던 일본식 건축이나 조경, 인테리어 분야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목계는 고국인 중국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해 생몰연도가 미상으로 대략 1210년부터 약 6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중국의 옛 수도인 허난 성 북동부의 카이펑 시 또는 쓰촨 지역 출신으로 추측되며, 불교 성지인 어메이산의 만년사(萬年寺)에서 수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항저우(杭州)에 있는 시후(西湖)의 아름다움에 반해 호수 가까이에 위치한 육통사(六通寺)에서 머물며 활동했다. 육통사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목계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 주제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소재로 작품을 그렸으며,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로 이 역시 교토의 다이토쿠사에 보관되어 있다. 소상팔경도는 일본 도쿄의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국에서 가장 큰 담수호였던 동정호(洞庭湖)의 남쪽 영릉(零陵) 부근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말이다. 양쯔강 네 개의 지류가 유입되는 호수의 규모 자체가 압도적으로 크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간직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오늘날까지 많은 문인과 화가들의 작품 속에 그려지고 있다. 시인 두보(杜甫)가 악양루에 오른 후에 쓴 서정적인 시 등악양루(登岳陽樓)가 유명하다.
작가 연대 참고 : 윤철규의 '한국미술명작선'
시후 사진 출처 : Promotec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