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의 화려한 유희, 물랭 루즈
*1900년 무렵의 물랭 루즈의 전경 http://www.moulinrouge.fr/histoire/periods?lang=en
물랭 루즈(Moulin Rouge)는 1889년 10월 5일에 개장했는데, 이날은 파리의 벨 에포크 중 가장 중요한 날의 하나로 기록된다. 흥행주이자 기업가인 샤를 지들러 Charles Zidler 가 소박한 대중 무도장(Blanche) 자리에 거대한 종합 유흥지를 건설한 것이다. 장식가인 아돌트 빌레트 Adolphe Léon Willette 가 이 건물 위에 올려놓은 우아한 목제 풍차는 그 붉은 날개로 클리쉬가(Boulevard de Clichy)의 하늘을 선회했다.
몽마르트르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유럽의 저명한 귀족과 왕족, 그리고 파리 시민들이 몽마르트르의 분위기에 이끌려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몰려왔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도 황태자 시절 이곳을 주기적으로 찾았다. 로트렉 역시 이 유희의 공장을 즐겨 찾게 되었다. 로트렉과 친구들은 샤 누아르(Chat Noir / 검은 고양이)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곳의 주인 로돌프 살리 Rodolphe Salis 는 예술가들을 위한 술집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몇몇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인들과 예술가들을 설득하여 몽마르트르로 오게 했고, 술을 마시거나 예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중개를 하는 조건으로 작품을 제공받았다. 이렇게 해서 샤 누아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곧 파리 시민들도 이곳에 와서 맥주를 마시면서 루이 13세 시대 가구들로 장식된 홀을 구경했다. 그러나 로트렉은 시나 문학, 작가들의 토론 등에는 그리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대신 몽마르트르의 카페와 공연장의 소음과 움직임, 야단스러운 소란이 로트렉을 사로잡았다. 로트렉은 무도회장이나 르픽가(Rue Lepic)에 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에 자주 드나들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가장 큰 작품 두 점을 바에 걸자는 지들러의 제안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 무렵 로트렉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우선순위를 이미 정해 두게 된다. 명예보다는 축제가, 파리 살롱의 고상한 취향보다는 몽마르트르가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당신 그림에서 내 엉덩이를 보니
정말 아름답군요.
로트렉이 물랭 루즈에서 만난 많은 여인들 중 그가 최고의 걸작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여인은 몽마르트르의 여왕이라 불렸던 라 굴뤼 La Goulue 였다. 본명이 루이즈 베버 Louise Weber 인 라 굴뤼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알자스 지방의 유대인 가정 출신이었다. 그녀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댄서로 일하기 전에는 어머니와 함께 세탁소에서 일했는데, 손님들의 값비싼 옷을 입고 무대 위의 댄서가 되는 상상을 즐겨했다고 한다. 소녀 '루이즈'의 열정과 노력은 탐스럽게 피어나 마침 황금기를 맞은 파리에서 최고의 무희 '라 굴뤼'로 이름을 떨쳤고, 그런 그녀를 자신의 무대에 세우기 위해 클럽의 주인들은 앞다투어 당대 최고의 보수를 약속했다. 그녀의 예명인 라 굴뤼는 공연을 보러 온 손님들의 술잔을 익살스러운 춤과 몸짓으로 빼돌려 훔쳐마시는 습관 때문에 붙여진 애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르느와르가 그린, 인상파의 가장 유명한 걸작 중 하나인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라 굴뤼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무희로 활동하던 중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를 만났고, 그의 주선으로 여러 사진작가와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특히 라 굴뤼의 누드사진을 많이 찍었던 Achille Delmaet는 후에 사진작가로 큰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녀는 캉캉(Can-can)*이라 불렸던 춤의 원형이 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춤을 유행시켰다.
*일반적으로 캉캉은 여성댄서들로 이루어진 화려한 그룹 공연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러한 형태의 춤이 무대에 올려지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남녀 구분 없이 추는 춤이었다고 한다.
브뤼앙의 카바레 근처에 있는 엘리제 몽마르트르에서 라 굴뤼를 알게 된 로트렉은 그녀가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8년 동안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무희로서 정점을 찍은 시기가 지나고 점차 퇴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녀는 가건물의 서커스장에나 출연하게 되는데, 1895년 로트렉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두 점의 패널화로 이 가건물을 장식해주었다. 그의 그림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보게 되니 정말 아름답다고 속삭여 주던 여인, 라 굴뤼. 이 여인의 매력에 한없이 사로잡힌 로트렉은 라 굴뤼의 모습을 담은 유화, 포스터, 석판화를 열 점 가량 제작했으며, 오늘날 그중 대다수의 작품이 로트렉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로트렉은 물랭 루즈를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를 의뢰받게 된다. 로트렉은 발랭탱 르 데조세 Valentin le désossé 로 알려진 르노댕 Jacques Renaudin 과 함께 춤을 추는 라 굴뤼를 그렸다. 와인 거래상이자 취미로 물랭 루즈의 무대에서 춤을 추던 르노댕은 새 같은 옆모습과 호두까기 같은 턱의 소유자로, 춤에 열정적이었으며 항상 반질반질 윤이 나는 중산모를 쓰고 있었다. 곧 파리 전역에 퍼진 로트렉의 포스터는 인상적인 색채와 날카로운 실루엣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은 대중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는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이자 진정한 예술작품이었다. 수집가들이 이 작품처럼 높게 평가한 포스터는 이전에 없었다. 수집가들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 보수적인 예술 평론가들은 '세 가지 색으로 그린 포스터'가 탄성을 이끌어 내는 모든 곳에서 미술 아카데미를 모욕하고 있다고 기술했고, 무정부주의 예술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 Félix Fénéon 은 독자들에게 활력이 넘치는 이 그림을 손에 넣으라며 이 최고의 포스터를 파리의 벽에서 떼어 가질 것을 부추겼다.
무대에서는 길고 검은 장갑으로 유명한 이베트 길베르 Yvette Guilbert 가 노래를 하고 있고, 잔 아브릴 Jane Avril 과 작가 에두아르 뒤자르댕 Édouard Dujardin 이 함께 공연을 보고 있다.
*에두아르 뒤자르댕은 소설 <월계수들 베어지다> Les lauriers sont coupés (1888) 의 저자이다.
다른 판화 작품들에서 로트렉은 자신이 살던 시대에 관한 재기 있고 익살맞은 관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이베트 길베르가 활동하던 카페 콩세르의 이름을 딴 제목의 그림인 <디방 자포네> Divan Japonais 나 가수이자 무희인 잔 아브릴 Jane Avril 을 묘사한 그림인 <자르댕 드 파리> Jardin de Paris 를 보면, 로트렉이 일본의 판화집을 보고 형태와 단색적인 영역이 자아내는 유희에 매료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로트렉은 이와 같은 양식으로 브뤼앙의 1892년 공연 포스터에 그를 그려 넣었다. 이 포스터에서 브뤼앙은 밝은 적색 스카프를 늘어뜨린 채 테가 넓은 모자를 손에 들고 있다. 이 그림은 훗날 포스터 분야의 대작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브뤼앙을 그린 포스터는 포스터가 독자적인 미술관을 가져도 될 만한 진정한 예술 형태의 하나라는 인식을 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891년 음악 공연장 카지도 드 파리(Casino de Paris)가 화려한 선전과 함께 개장하면서 다소 침체한 물랭 루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지들러의 새 동업자인 조제프 올레 Joseph Oller 는 인기 배우들을 고용했고, 이들의 매력에 사로잡힌 로트렉은 콜랭쿠르가(Caulaincourt)에 위치한 작업실에 있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카페 콩세르에서 보내며 젊은 인재가 파리 무대의 인기 배우로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특히 물랭 루즈에 소속되지 않은 배우인 잔 아브릴과 긴 실루엣과 팔꿈치까지 오는 검은 장갑으로 남자들을 매료시켰던 이베트 길베르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결국 로트렉은 이 두 여인에게 영원한 명성을 안겨주었다.
물랭 드 라 갈레트(Moulin de la Galette)에서 로트렉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진정 보는 즐거움을 경험했다. 가스램프 아래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펼쳐진 속옷이나 노출된 맨살이 분위기를 열에 들뜨고 헐떡거리며 화끈하게 만드는 동안 로트렉은 그 분위기를 즐겁게 호흡했다.
술잔을 앞에 놓고 그는 노트나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종이 위에 스케치를 했다. 때로는 불에 탄 성냥개비로 신체나 두상을 그렸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그림을 그렸고, 댄스홀 안에서 서로 떠밀리는 사람들이나 여인들의 유혹하는 듯한 몸짓, 남자들의 충혈된 눈, 그 와 중에도 이루어지는 거래, 표정 흉내 내기, 엉덩이의 시니컬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바라보았다.
원초적인 상태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 댄스홀에서 로트렉은 누구보다도 더 열광적인 관중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도 감각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흥분감에 빠졌다. 이런 분위기는 너무나 강렬하고 가슴을 찌르는 것이어서 그는 거기에서 경련을 느낄 만큼 전율했다. 로트렉은 끊임없이 연필을 잡고 어떤 것이든 냉정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감출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이가 가지는 아이러니와 통렬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끓어오르는 혈기로 주위를 바라보고 그림을 그렸고 술을 마셔댔다.
연극을 숭배했던 로트렉은 19세기 후반 파리의 연극계를 후대에 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로트렉은 무대나 무대 뒤의 배우들, 특히 여성 배우들을 뒤쫓아가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곤 했다. 그는 바리에테 극장(Théâtre des Variétés)에서 공연된 오페레타 <실페리크> Chilpéric 를 수십 번이 넘게 관람했다. 로트렉의 친구이자 화상이었던 모리스 주아양 Maurice Joyant 의 주도하에, 구필(Goupil) 화랑의 테오 반 고흐 Theo van Gogh 는 몽마르트르와 카페 콩세르(Café-Concert)에 갇혀 있던 로트렉의 미술을 점차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로트렉은 쥘 르나르 Jules Renard 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문학작품에 삽화를 그려 주었다. 그러한 작업은 로트렉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를 확장시켜 주었고, 몇 년 후 그의 작품들은 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95년 이후 로트렉은 몽마르트르 주변의 작은 바인 카페 콩세르보다는 극장에 자주 모습을 드려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보기' 위해서였다. 로트렉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조명의 유희나 뛰어난 남녀 배우의 몸짓을 관심 깊게 보았다. 그래서 종종 떠들썩한 관객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모호한 상징주의적인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로트렉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무대의 열기와 배우들의 몸짓을 관찰하는데 몰두했다.
에르베의 오페레타 <실페리크>에 맞춰 볼레로를 추는 무희 마르셀 랑데
로트렉은 친구인 모리스 주아양을 통해 구필 화랑에서 일하던 반 고흐 형제를 알게 되었다. 주아양이 테오 반 고흐를 몽마르트르 대로에 자리 잡은 구필 화랑에 배치할 당시, 그는 아르퐁피에(Pompier - 아카데미 미술)나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 사실주의 풍경미술)의 그림 대신 최고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즉, 아방가르드 미술의 옹호자가 된 주아양은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외젠 카리에르 Eugène Carrière,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폴 고갱 Paul Gauguin 등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조직한 것이다.
카미유 피사로가 그린 몽마르트르의 밤거리
로트렉은 오랜 기간 구필 화랑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주아양의 조언에 따라 볼네이(Volnay) 거리의 미술집단과 발기인의 하나로 친구인 폴 시냐크 Paul Victor Jules Signac 가 끼어 있는 앵데팡당(Indépendants) 전시회에는 매년 몇 점씩 출품했다. 또한 자신이 즐겨 찾던 브뤼셀에서 열리는 20세기 그룹 전시회에도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하였다. 1893년 로트렉은 마침대 친구들의 끈질긴 권유를 외면하지 못하고 30점가량의 작품을 구필 화랑에 전시했다.
사람 사귀기를 싫어하고 칭찬에 인색했던 드가 Edgar Degas 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로트렉에게 경의를 표했다. "자, 로트렉. 당신이 우리 중의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졌군!"
특히 몽마르트르의 카페 콩세르와 매음굴에서는 레즈비언들의 사랑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사랑을 나누는 그들의 자세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은 로트렉은 여성의 동성애 성향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침대에서 서로 얽혀 잠을 자는 두 여성을 보며 로트렉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어느 것도 이처럼 명료하지 않다." 시인 보들레르 Charles Pierre Baudelaire 처럼 로트렉도 금지된 사랑이라는 주제에 덤벼든 것이다. 그는 이 금지된 사랑을 여러 점의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보들레르는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에 레스보스(Lesbos)와 같이 동성애를 주제로 하는 시를 실었다.
드가가 단식인쇄 판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처럼, 로트렉은 부르주아의 도덕성에 충격을 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 당대의 가장 앞선 화가였다. 1893년 그는 레즈비언들의 사랑을 담은 11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그중 5점은 <르 피가로 일뤼스트레> Le Figaro Illustré 에 실린 귀스타브 세프루아 Gustave Geffroy 의 기사 '파리의 쾌락'에 삽화로 사용됐다. 1894년과 1895년에 로트렉은 <두 친구>, <키스>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게 된다. 당시 그는 1년간을 물랭가의 한 매음굴에서 보내고 있었다.
1860년부터 화가 쿠르베 Gustave Courbet 가 여성들 간의 사랑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당시 레즈비언은 도색적인 사진들의 주요 주제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사진들은 외투 밑에 감추어 은밀히 거래되었다.
베르나르 당비르 <툴르즈 로트렉>, 1991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로트렉의 업적을 개인숭배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그가 서양미술 양식에 끼친 영향은 그의 개별적인 작품이 가진 가치 이상으로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취향'이라고 하는 화가와 일반 대중 사이에 자리한 무인지대의 순수한 미학적 영역보다 훨씬 광대한 영역에 자리할 것이다.
미술의 집단적인 혁명은 19세기 말 인상파에 의해 처음 개시되었다. 이들은 단지 '미술애호가'라고 알려진 상대적으로 제한된 대중의 영역을 파고들었다. 판화와 포스터를 통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로트렉은 미술의 혁명을 성취한 장본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유로운 색채의 구사, 보이는 '현실'에 의존하는 선과 형태로부터의 해방, 묘사적인 특질을 넘어설 정도의 장식적인 특질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미술작품이 대상에 대한 독자적인 구조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여타의 혁명적인 화가들보다 더욱 유명해진 것이다.
전통적인 원근 체계를 무시한 로트렉은 종종 순수하게 자의적인 기반에서 선택한 단조로운 색채를 병렬시켰다. 또한 20~30년 전이라면 조롱거리가 되었을 해부학적인 왜곡을 창출했다. 파리의 거리를 흠모하던 그의 작품들은 극장 팸플릿이나 광고, 그리고 수많은 판화와 출판물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세잔이나 반 고흐의 작품에 가해졌던 어떠한 종류의 적대적인 비평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사실상 그는 현대의 미술을 기술을 통한 재현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뷔야르 같은 훨씬 '신중한' 당대인들도 채색석판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에는 주저하면서 불안정한 태도를 보였다. 로트렉은 유화와의 관련성을 강화시키며 삽화 분야의 모든 미술에 어마어마한 힘을 불어넣었다. 창조적인 자부심을 가지고서 말이다. 로트렉의 영향은 광고와 연재만화, 그리고 공상과학 소설의 삽화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로트렉의 작품이 지닌 가장 뚜렷하고 중요한 선적인 양상은 그것들이 채색과 데생의 엄청난 하부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는 스케치북과 캔버스 위에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또 구성했다. 이 과정을 통해 로트렉은 필요 없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을 끊임없이 잘라 내어 외관의 본질, 즉 자세의 의미를 잡아냈다. 또한 로트렉은 인상파들이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으로 색채를 실험하고 인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것에서 색채를 해방했다. 그는 서양미술의 진보에서 보면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그를 다양한 시도를 통해 20세기 전체 미술의 발전을 거의 다 예견한 포스트 인상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췌문 및 참고자료
툴루즈 로트레크 - 밤의 빛을 사랑한 화가 <클레르 프레셰, 조세 프레셰 공저 / 김택 역>
로트렉, 몽마르트르의 빨간 풍차 <앙리 페뤼쇼 지음 / 강경 옮김>
이미지 출처 : www.wikiar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