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의 메시지

by Adyton

나는 오래전부터 피사로의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무르곤 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햇빛과 화려한 색채의 파도와 달리, 그의 풍경은 차분하고 절제된 인상을 남겼다. 뿌연 겨울 하늘, 가라앉은 들판,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들. 그러나 그 안에는 삶의 무게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애정 어린 눈길이 스며 있었다. 피사로는 화려하지 않은 일상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서 여전히 빛나는 온기를 발견하려 했다.


그의 풍경에는 늘 작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밭을 가는 농부, 장작을 지고 가는 나무꾼, 빨래를 너는 여인. 화면 구석에 작게 배치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는 그들을 강조하기 위해 화면을 과장하거나 드라마틱하게 연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존재로 남겼다. 나는 이 점에서 그의 진정성을 느낀다. 그는 민중의 삶을 미화하지 않았다. 노동은 일상적이지만 삶을 이어가는 힘이었고, 그 반복 속에 깃든 의지를 그는 붓으로 기록했다. 내가 피사로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을 숭고화하지 않으면서도, 무심히 흘려버리지 않는 균형감각.

Red roofs, corner of a village, winter (1877)

때때로 그의 풍경은 파스텔처럼 뿌옇게 번지고, 회갈색이 화면을 감싼다. 해가 짧고 빛이 약한 계절, 흐리거나 눈 쌓인 날의 장면이 그렇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계절도 음울하게 그리지 않았다. 색이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절제되어도 풍경 속에는 생활의 온기가 남아 있다. 이런 절제된 활력은 그가 존경했던 코로의 영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코로 역시 회색빛 하늘과 차분한 풍경을 즐겨 그렸지만, 피사로는 그 속에서도 삶의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발자국, 노동의 동작, 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연기. 그 차이가 두 사람의 풍경을 갈라놓는다.

Morning Sunlight on the Snow, Éragny-sur-Epte (1895)

내 책상 위에는 피사로의 Morning Sunlight on the Snow, Éragny-sur-Epte가 걸려 있다. 눈 덮인 들판 위로 한 여인이 양동이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은근한 따스함을 드러낸다. 나는 이 겨울 풍경 너머로 매일 새로 시작되는 하루를 본다. 여인은 노동을 시작하러 가는 길일 수도 있고, 단순히 집안일을 위해 물을 길으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녀는 멈추지 않고 눈밭을 지나가고 있다. 미술사 기록에 따르면, 피사로는 이 시기에 에라니 근교에서 “눈 위에 드리운 빛의 반짝임”을 끊임없이 관찰했다고 한다.


나는 서재에서 이 그림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특히 겨울 아침, 아직 잠이 덜 깬 채 책상 앞에 앉으면 창밖의 차가운 공기가 그림 속 풍경과 겹쳐진다. 속눈썹 끝에 맺힌 잠의 열매를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하기가 망설여지는 순간에도, 그림 속 여인은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모습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너도 오늘 하루를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행운의 부적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향한 격려의 장치다.


Woman Hanging up the Washing (1887)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면 그의 태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Woman Hanging Out the Washing(1887)에서는 빨래를 너는 여인과 아이가 등장한다. 그는 분할주의 기법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을 따뜻하게 담았다. 당시 인상파 내부에서는 세라와 시냐크가 제시한 분할주의를 두고 논쟁이 치열했다. 피사로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했으나 끝내 완전히 몰입하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적 이론보다 인간적 감각을 택했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규칙적 점묘보다 일상의 숨결이 더 크게 다가온다.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작지만 진정한 걸작”이라 했고, 드가는 “시장에 가는 천사들 같다”는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드물게도 이 작품에서는 다정한 정서가 화면 전체에 번져 있다.



Hoarfrost(1873)

반대로 Hoarfrost(1873) 같은 초기 작품은 겨울 아침 들판에 내린 서리를 담백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당대 평론가들은 가혹했다. 《르 피가로》에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풍경”, “지저분하게 긁어댄 캔버스”라는 혹평이 실렸다. 이 작품이 전시된 1874년은 첫 인상파 전시가 열린 해였다. 비평가들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와 함께 피사로의 그림을 조롱하며 “아직 끝나지도 않은 스케치”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단순한 붓질 속에서 아침 햇살의 섬세한 떨림을 본다. 흙빛 물감 아래에서 피사로는 평론가들이 보지 못한, 생명이 가장 낮은 곳에서 기지개를 켜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세간의 조롱에도 자신의 시선을 굽히지 않았다.


피사로의 그림은 내게 늘 균형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삶은 언제나 화려한 색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고, 푸른 녹음이 싱그러운 계절은 짧게 스쳐간다. 잿빛 겨울 하늘, 흐린 날의 눅진한 대기, 질척이는 흙탕길, 반복되는 노동의 단조로움이야말로 삶의 가장 솔직한 얼굴이다. 그것은 덧없거나 허무한 것이 아니다. 눈 위에 남은 작은 발자국에 햇살이 스며들듯, 우리의 존재 또한 그 풍경 속에 남는다. 나는 그래서 그의 그림이 좋다.


Fishmarket (1902)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그림이 지금의 나에게 왜 필요한지를 생각한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과 일상은 때때로 무겁게 다가오지만, 피사로의 풍경은 그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삶의 단순한 반복 속에서도 빛은 온기처럼 퍼지고, 무채색 풍경 속에서도 색은 살아 움직인다. 피사로의 그림을 마주하는 일은 곧 내 하루를 받아들이는 일과 같다. 그의 붓끝에서 태어난 풍경들은 결국 나의 풍경과도 맞닿아 있다. 매일 아침의 짧은 피로와 그럼에도 내딛는 발걸음이 그의 그림 속 여인과 농부, 나무꾼의 발걸음과 겹쳐진다. 그래서 책상 위에 걸린 그의 그림은 취향의 전시가 아니라, 나 자신과 매일 맺는 약속이다. 또 다른 오늘이 다시 시작될 거라는 기대, 그늘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미지 출처: Google Arts&Culture Camille Pissarro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불꽃의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