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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yton Oct 14. 2017

차와 시래깃국

그리고 색소폰 소리


추석 전날, 손님용 이불을 내오려 다락 창고에 올라갔다가 한쪽 구석에 쌓여있던 가족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포켓이 가득 차 다 끼우지 못하고 비닐케이스에 담긴 사진 몇 장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꺼내보니 딱 17년 전 겨울 필름 카메라로 찍어 인화한 배내골의 사진이다.



산속 어느 골짜기를 지나다 솟대를 보고 우연히 들어간 곳이었다. 꽤 넓은 앞마당에는 나무 장승들과 장독대가 낮은 돌담을 따라 세워져 있었고, 어디선가 짙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몇 명이 목조 가옥의 툇마루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찻집에서는 차와 국밥을 팔고 있었다. 전통차 몇 종과 시래깃국만으로 채워진 단출한 메뉴판을 보고 나와 아버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싱긋 웃었더랬다. 숱한 결정의 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일상의 노고가 필요 없는 담백한 주문의 과정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깃국을 내어왔을 때 코끝으로 파고들던, 말린 나물과 육수가 내는 특유의 국물 냄새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구수하다'라는 수식만으로는 부족한, 달궈진 무쇠솥에 오랜 시간 장작으로 팔팔 끓여낸 정직한 재료와 시간이 우러난 맛이었다. 잘게 썬 김치가 반찬의 전부였던 그 날의 늦은 점심식사와 장독대가 늘어서 있던 마당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베내골로 찾아갔다.



배내골로 가는 길의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차와 식사'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입구가 분명했던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나무를 헤치고 들어가자, 꽤 오래전 평평히 갈아놓은 듯한 수풀이 우거진 공터만 남아있었다.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람도 집도, 장승도 그 자리 그대로 존재하리라는 가당치 않은 기대를 한 탓에 작은 서글픔이 밀려왔다. 수풀 너머로 대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굴뚝으로 국솥을 데우는 아궁이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찻집이 보일 것만 같았다. 주인 내외분이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기를, 연주자 아저씨들도 다른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살가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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