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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yton Jun 14. 2018

매실 익어가는 저녁

동매마을





#푸른 불

섬진강을 끼고 달리던 시각이 오전 11시쯤이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겨우 유월 초에 들어섰을 뿐인데,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는 경고 문자가 긴 진동으로 울려댔다. 뙤약볕에 달궈진 땅 위로 온 사방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꽃도 나무도 산도 들도 모두 푸른 불로 이글거렸다. 올해 처음 만난 한여름의 열기였다.


#계절에 대한 희망

마을을 찾아 들어가던 길에 지나쳤던, 밭일을 하다 그늘에 주저앉은 아주머니들은 푸념을 했다.

"행님, 이래 더워가꼬 올해는 또 을매나 덥겠노. 진짜로 겁난다아이가."

"그래말이다. 올해 또 작년만치로 더우면 우째 살겠노..."

나도 간절히 아주머니의 한숨 섞인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농부의 발걸음

영화 Little Forest(일본, 2014)의 주인공은 벼가 농부의 걸음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말했다. 벼는 자신이 몸을 담근 논의 물길을 보살피는 농부의 발소리를 구분할까. 그날 갓 심겨 이제 푸른 잎을 세우기 시작하던 어린 벼는 낯선 이방인의 발걸음에 잠깐 숨을 고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월의 벼는 꽃보다 어여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앙칼진 눈동자

모퉁이를 돌아선 나를 맞닥뜨린 길고양이는 얼음같이 멈춰 서서 나를 쏘아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깐, 못 보던 얼굴인데? 뭐 딱히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

고양이들이 나를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나도 그네들이 좋지도 싫지도 않다. 다만 고양이들은 피사체로서 묘한 매력이 있기에, 종종 카메라를 들고 있다 만나면 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생물체는 호기심과 경계심의 총량을 항상 균등하게 유지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봄의 열매

유월의 매실도 꽃보다 어여쁠 수 있다. 완전히 익어 통통해지기 직전의 매실은 솜털이 보송한 아이의 볼처럼 귀엽다. 숙소 뒷산과 바로 옆 과수원이 온통 싱그러운 매실밭이었다. 저녁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듯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책을 하러 문을 나서니 앞마당의 화단에 물을 주던 주인이 불러 세웠다. 양귀비는 심은 적이 없는데 여기 씨앗이 뿌려져 딱 한 송이가 피었다고, 신기하지 않냐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일부러 키울 수는 없는 꽃이니 이 아이가 올해 씨를 뿌리면 내년엔 꽃송이가 늘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근처 과수원을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데 이 무렵엔 아직 익은 열매가 없어 대접할 게 없다며 미안해했다. 대신 앵두가 맛있게 익었으니 마음껏 따먹으라고 했다. 새들 몫으로 자라게 둔 것 같아, 두서너 알 따서 맛만 보았는데 과육처럼 빨간 단맛이 났다.


#해넘이

건너 마을의 산등성이로 난 길을 넘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산 꼭대기에서부터 짙은 어둠이 타고내리기 시작해서 겁이 나 발길을 돌렸다. 내려가면서 마을 초입에 들어서는 길목의 돌다리 위에 잠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크고 평평한 바위 위를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산골짜기를 따라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집집마다 불은 켜져 있는데 길에는 인적이 없었다. 산속에 묻힌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녁상 앞에 모여들었을 시간이었다. 내 집은 아니지만, 하루 몸을 누일 방이 있는 아랫마을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릴 때 할머니는 '어둠사리'가 들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라 당부하시곤 했는데,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라는 옛사람들 말은 이런 뜻이었나 보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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