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
ESTJ. 16가지의 MBTI 유형 중에서 애인으로는 피해야 하는 유형으로 종종 손꼽히는 유형이다. 모든 일에 대해 효율과 옳고 그름, 사실과 객관적인 판단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엄격한 관리자] 유형. 이 글은 나와 4년째 연애 중인, 대문자 ESTJ 애인의 관찰일지다.
첫째, 애인은 쓸데없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런 이야기를 왜 해야 하는지?' 하며 이해를 못 하는 지경. 보통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나 추상적인 맥락이 섞여있는 대화를 그렇게 여기는데, 실제 사례로 예를 들자면 "하고 많은 동네 중에 나는 어쩌다 이 동네에 와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하는 문득 새삼스러운 이야기, 혹은 "우리가 만약 고등학생 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와 같은 만약에 st 이야기들이 이에 해당한다.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안타깝게도 애인에게는 [쓸데없는 이야기]의 범주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 이야기에 대한 애인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 뭔가 챗GPT 스럽거나(아니 요즘은 챗GPT가 많이 발전해서 더 나은 것 같다. 그 옛날 원조 말동무였던 '심심이' 정도의 반응에 더 가까운 듯.) 다소 영혼이 부족한 'ㅎㅎ' 정도의 리액션이 나온다면? 그는 아마 내 이야기의 중간쯤부터 [쓸데없는 이야기]로 분류하고 난 후, 한 귀로 흘릴 준비를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같은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고 했던 <미스터션샤인>의 김희성과 내 애인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에 도움 되지 않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김희성을 한심하게 봤을지도. 아니다, 애초에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술 한잔에 센치해져서 괜히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지면, 애인의 답변에 늘 정신이 번뜩 차려진다.
나 : "하고 많은 동네 중 내가 어쩌다 이 동네에 와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애인 : "보증금 조건에 맞는 곳 찾다 보니까"
둘째, 감정을 표현하는 대화를 어려워한다. 대체로 무형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해내기를 어려워한다. 이 또한 '왜 이런 걸 생각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애인에게 나를 처음 봤던 순간의 느낌이 어땠냐 물으면 '눈이 예뻤어' 정도로 대답하곤 하는데, 이처럼 느낌을 묻는 질문에도 감정이나 인상에 기반한 대답보다는 대체로 눈으로 보이는 유형의 것, 사실에 근거한 현상에 대해 기술한다.
더 나아가, '처음 봤을 때 예상했던 성격과 실제 성격이 같았다던지, 달라서 놀랐다던지 혹은 첫인상에 나와 인연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던지 아니면 전혀 잘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던지' 등의 더욱 느낌적인 느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가 전개되면 애인은 급 회피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에 회피 중인 애인에게 계속 질문했다가는 아예 [쓸데없는 이야기]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냥 '애인은 나를 처음 봤을 때 별 느낌 없었음'이라는 것을 서운해하지 말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책임감이 매우 강하다. 애인의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니, 마치 전쟁 난리통에 어떻게든 6남매 식솔들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얼핏 스친다.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30대 초입의 그에게 어찌 저런 책임감이 생긴 걸까. 직장에서 맡은 일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맡고 있는 여러 역할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 직장에서의 일만으로도 하루 걸러 하루 꼴로 투덜대는 나와는 달리 그는 불만을 가지지도, 불평을 늘어놓지도, 버거워하지도 않는다. 그런 애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등짝 어딘가에 건전지 같은 물리적인 에너지원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든다. 진짜 로봇이 아니고 사람인 이상 언제나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닐 테고, 매일이 버겁지 않은 것이 아닐 거다. 힘듦이 티가 나지 않는 이유까지도, 그의 책임감이겠지.
넷째. 꾸밈이 없다. 허세와 사치, 보여주기식의 무언가와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이다. 태생적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이 꽤 단단히 탑재된 느낌.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가지지 않았으면 가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부끄러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아서 자기를 포장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자기계발이라면 모를까) 옷도 가방도 신발도, 그저 신체를 보호하고 물건을 수납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가끔씩 그에게 명품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브랜드의 지갑, 가방 등을 선물해 주곤 하는데 그는 그저 내게 받은 선물에 기뻐할 뿐, 브랜드를 알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만약 누군가 내 애인의 앞에서 은근슬쩍 본인의 무언가를 자랑한다면 내 애인은 눈치채지 못할 거다. 아마도 그는 내일의 업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
다섯째. 탐구욕과 학습욕이 강하다. 본인이 몰랐던 '지식을 익히고 습득하는 것' 자체에 큰 재미를 느끼는 듯하다. 이런 특징은 여행 중 특히 더 확인할 수 있는데, 만약 관광지를 구경하다가 애인이 자꾸 핸드폰을 보고 있다면 잔소리를 쏟아내지 말고 잠시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관광지를 둘러보다 머릿속에 떠오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역사적 사실을 찾고 있거나, 내가 무심코 내뱉은 "이 문은 모양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 하는 리액션(내가 여행 중 뱉는 말들은 리액션 개념에 가깝다. 나는 관광지에서 이 문의 모양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팩트까지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다.)에 대한 정답을 찾아주기 위한 정보 탐색 중일 가능성이 높다. 전자의 경우라면 진심으로 즐겁게 여행을 즐기는 중인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진심으로 나를 애정하는 마음을 표현 중인 것이니. 그가 팩트 체크를 마친 후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그저 끄덕끄덕 잘 들어주면 된다.
생각해 보면 애인에게는 연애도 학습의 과정인 듯하다. 가끔 내가 서운함을 이야기할 때면 잘 습득해 두었다가, 같은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상황일 때면 그에게 잘 입력될 수 있도록 최대한 이성적인 논리와 언어로 나의 섭섭함을 코딩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그저 감정만을 쏟아낸다면 그 순간에는 나를 달래주더라도 속마음으로는 이해를 못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순간적 감정이 치솟더라도 대문자 ESTJ 애인와 잘 지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이성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하다.
물론 모든 ESTJ 유형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MBTI 유형의 특징을 통해 애인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분명 MBTI의 순기능이다. 애초에 사물을 받아들이는 감각의 영역이나,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우선적으로 작동하는 사고의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연애 상대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꽤나 유의미한 발전이다.
연인 간 흔하게 주고 받는 질문이 있다. 바로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라며 나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상대로부터 스스로 상상하게 하는 질문. 보통 대답으로 생각할 수 있는 '딱 하루 뒤에 따라 죽을 거야' 라던지 '상상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와 같은, 조금 닭살스럽지만 애정도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반응을 기대하며 나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나 기대와는 조금 달랐던.......... 대문자 ESTJ 내 애인의 반응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지."
장례 방식까지 미리 생각해 주는 나의 애인에게, 이 글을 빌어 애정 어린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