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고, 쓰다(22)-바나나가 더 일찍 오려면

by 숨CHIP

제목 : 바나나가 더 일찍 오려면

작가 : 정진호 그림책

출판사 : 사계절




이른 새벽,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누군가의 집 문 앞에 바나나가 들어있는 택배를 놓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민주씨가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쇼핑 앱을 이용해 바나나를 주문하는 것입니다. 아침 대용으로 먹기 위해 새벽 배송을 신청합니다.


새벽 배송을 하려면 택배 기사님은 더 이른 새벽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물류창고에는 전국에서 모인 택배가 쌓여있고 그중 기사님이 배달할 지역으로 주문된 물건을 선별하여 트럭에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당일배송은 전날 특정한 시간 전까지 주문한 물품을 다음 날 아침 일찍 배달해 주는 시스템입니다. 민주씨가 주문한 바나나를 배송하기 위해 택배기사님은 아직 둥근달이 떠 있는 어두운 새벽을 가르며 출발합니다.

하루 종일 트럭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트럭에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달이 떠 있는 새벽에 기름을 넣으려면 그보다 더 일찍 문을 연 주유소에 가야 합니다. 주유소에는 새벽 4부터 영업을 한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습니다. 무표정한 주유소 직원이 도착한 택배 트럭에 기름을 넣고 있습니다.


주유소가 새벽에 영업을 시작하려면 직원은 그보다 더 일찍 출근해야 합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도시보다 더 어두운 지하에는 지하철이 달립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첫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합니다.

어둠을 가르며 지하철이 안전하게 출발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일찍 철로 정비를 마쳐야 합니다. 캄캄한 땅속, 환하게 밝혀진 철로에는 정비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전기를 살피고, 부서지거나 잘못된 철로가 있는지 눈과 망치를 이용해 확인합니다. 촘촘하게 설치된 각종 등을 살피고 교체하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가거나 공중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새벽까지 철로 정비를 마친 사람들이 새벽밥을 먹습니다. 커다란 상에 그득하게 밥이 담긴 밥그릇이 차려져 있습니다. 배추전과 메추리알 등 반찬도 정갈하게 담겨 있고 물컵과 휴지, 앞접시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밥상의 중심에는 매인 메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선찌개입니다.

식당 주인은 새벽밥을 준비하기 위해 어둠을 뚫고 장을 보러 시장에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을 자는 시간이지만 시장은 활기가 넘칩니다. 청과점에는 산지에서 바로 올라온 신선한 오이, 무, 당근과 제철 나물, 과일들이 가판대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육점의 냉장고 안에는 말끔하게 포장된 고기들이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시세는 미국산 1근에 만 원, 국산 한우는 kg당 칠만 오천 원입니다. 전국으로 택배 배송도 가능합니다. 사각 얼음 위에 갈치, 문어, 새우, 게와 각종 생선들이 신선해 보입니다. 수조에는 활어가 헤엄치고 가게 앞 바구니에는 조개, 소라와 개불도 있습니다.


파마머리에 이마에 주름이 가득 한 생선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부지런히 생선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잘 정리해 놓아야 새벽밥을 차려야 하는 식당 주인들에게 물건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틈없이 깔아 놓은 얼음 위에 갈치 등 종류별로 다양한 생선을 올려놓습니다. 어떤 생선은 토막을 내기도 합니다. 횟감용 생선도 준비합니다.


이 생선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와 싸워가며 어부들이 잡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바닷속에서 물고기들을 유인하기 위해 대낮처럼 조명을 밝힌 어선들이 파도에 따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잡아 올리는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입니다. 다행히도 오늘 밤은 둥근 달님이 환하게 떴습니다.


캄캄한 밤을 대낮처럼 밝혀주는 조명은 공장 노동자들이 깊은 밤까지 야간작업을 하며 만들어 낸 것입니다. 수십, 수백의 노동자들이 똑같은 모자를 쓰고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합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는 기계에서 만들어진 전구를 끝도 없이 싣고 옵니다. 공장 곳곳에는 각종 작업 지시사항들이 걸려 있습니다. 작업 중에는 잡담 금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은 3분, 일등 품질을 위해 만 번 살펴보기. 작업 중인 노동자들의 표정이 모두 똑같습니다.


쉴 새 없이 공장 기계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합니다. 전기는 발전소에서 만들어냅니다. 크거나 작거나, 길거나 짧은 발전소의 굴뚝에서 쉬지 않고 연기가 하늘로 솟아납니다. 이러다가는 하늘이 온통 연기로 뒤덮일지도 모릅니다.


전기가 끊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발전소 직원들은 밤에도 퇴근하지 못합니다.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야간 근무를 합니다. 커다란 발전기와 각종 장비들이 다양한 관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곳곳에 계기판과 조절 밸브, 스위치 등이 보입니다. 야간 근무자는 정해진 시간마다 발전소 곳곳을 돌며 발전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계기판의 수치는 적당한지, 느슨해진 밸브는 없는지 확인합니다. 안전이 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작업복과 개인 사물함, 각종 청소 도구가 보관되어 있는 휴게실입니다. 직원들이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청소를 마쳐야 하는데 수진 씨가 조금 늦게 오는가 봅니다. 발전소에서 일하는 남편의 퇴근이 늦어지면 수진 씨의 출근도 늦어지는데 그 이유는 아빠와 엄마가 교대하며 아이를 돌보기 때문입니다.


수진 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뒷좌석에 아이를 태운 채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남편의 퇴근이 늦어져서 급히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러 가는 길입니다. 새벽이어서 어린이집 통근버스도 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 코끼리 미끄럼틀, 돼지 시소, 말 스프링 의자가 있습니다. 새싹 어린이집입니다. 이마에 주름이 있는 원장님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새벽에 등원하는 아이를 돌볼 교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씨의 휴대전화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새싹 어린이집 원장입니다. 새벽 연장 돌봄 신청으로 보육교사가 필요한데 내일 출근이 가능하냐고 민주씨에게 묻습니다. 급하다며 간곡히 부탁합니다. 연정 돌봄이 생길 때마다 정교사가 아닌 임시 교사를 구하는가 봅니다.

민주씨는 내일 새벽에 출근해야 합니다. 아침을 챙겨 먹을 시간이 부족하여 아침 대신 먹을 바나나를 주문합니다. 휴대폰 화면에는 1송이당 1.5킬로나 하는 신선한 고당도 바나나 3송이를 45% 할인된 가격으로 팔고 있습니다. 지금 주문하면 내일 새벽 도착을 보장하는 상품입니다. 추가 쿠폰도 받을 수 있고 구매평도 별 4.5개로 아주 좋은 상품인 것 같습니다. 민주씨는 구매하기 버튼을 꾹 누릅니다.


다음 날 새벽, 민주씨가 아침 대신 먹을 바나나를 택배기사님이 문 앞에 내려놓습니다. 바나나 외에도 새벽 배송으로 주문한 생수와 다른 물품 상자들이 여러 개 문 앞에 쌓여있습니다.

작가는 건축 전공자로 그림책 속에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민주인권그림책 시리즈입니다.

뒤표지에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손님이 원할 때라면 새벽에도 배송하는 택배차가 어두운 밤을 오늘도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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