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읽고, 쓰다 (26) - 꽃에 미친 김 군

by 숨CHIP

제목 : 꽃에 미친 김 군

작가 : 김동성

출판사 : 보림




표지에 모란꽃이 한가득 피었습니다. 탕건을 쓰고 부채를 든 손을 뒷짐 진 채 상체를 쭈욱 내밀어 김 군이 모란을 보고 있습니다.


표지를 넘기면 책등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만든 것 같은 형태인데 누드제본 방식입니다.

초가가 올려진 돌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넝쿨식물 아래 이름 모를 풀들 속에서 노란 민들레가 피었습니다. 짚신을 신은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신기한 듯 민들레를 바라봅니다.


담벼락 아래에는 마가렛(데이지 또는 구절초) 꽃과 패랭이(또는 석죽)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아이는 담을 따라가며 꽃놀이에 흠뻑 빠졌습니다. 꽃을 따다가 꽃다발도 만들었습니다. 한참을 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돌담과 초가지붕까지 덮을 만큼 나팔꽃이 만개하였습니다.


아이는 활짝 핀 나팔꽃 앞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꽃의 세계에 빠져든 순간입니다.


초가집 한 채가 꽃이 만발한 정원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방이 두 개인 집인데 왼쪽 방에는 옷가지와 이불이 보이고 오른쪽 방에는 문방사우가 가득합니다. 입구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다양한 모양의 돌판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 있고 돌판 옆에는 호미와 흙, 물병이 보입니다. 흙으로 된 마당에는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화분과 꽃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등나무꽃, 구절초류, 백일홍, 매화, 그 외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마당 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나팔꽃을 보며 꽃의 세계에 빠진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꽃과 함께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김 군이라고 불렀습니다. 뒷짐 진 손에 부채를 든 김 군이 지지대를 타고 올라가며 꽃을 피우는 나팔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김 군의 하루는 밤사이 꽃들이 잘 있었는지 살피는 일로 시작합니다. 돌덩이를 계단처럼 쌓아 놓은 마당에 노랑, 자주, 분홍, 흰 꽃들이 다투지 않고 자라고 있습니다. 짚으로 만든 바구니에는 훌쩍 커버린 모종이 자라고 김 군은 낫을 이용해 모종을 마당에 심고 있습니다. 담장 너머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꽃을 다루는 김 군을 슬쩍 쳐다보며 지나갑니다.


커다란 화분에 꽃이 가득합니다. 김 군은 틈만 나면 화분 앞에 오도카니 앉아 한 손은 턱을 괸 채 꽃을 바라보며 오후를 보냅니다. 김 군 옆으로는 (작가의 상상력인지 실제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종삽과 물 조리개가 놓여 있습니다.

밤이 되면 꽃과 관련한 책을 읽다 잠이 듭니다. 초 한 자루가 불을 밝히고 그 아래 김 군이 탁자에 팔을 기댄 채 비스듬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낮에 따 온 꽃을 들고 있습니다. 김 군 앞에 자리 잡은 개다리소반 위에는 술병과 술이 채워진 술잔이 있습니다.

김 군의 책상 위에는 항상 들고 다니는 부채와 책이 펼쳐져 있고 책 위에는 고무줄 안경이 올려져 있습니다. 붓 통에는 다양한 종류의 붓이 꽂혀 있습니다. 붓 통 뒤로는 꽃 그림이 그려진 책이 있습니다. 벼루와 먹, 연적 앞에는 꽃 한 송이가 떠 있는 차와 찻주전자가 있습니다. 그 곁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 있습니다. 김 군은 매일 꽃 책을 읽고, 꽃 그림책을 보고, 꽃 시를 읊고, 꽃차를 마십니다. 심지어 그가 기르는 강아지와 고양이 이름도 청화, 백화라고 지을 정도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등나무에 등나무꽃이 치렁치렁 열렸습니다. 한쪽에서는 나팔꽃 넝쿨이 담을 타고 오르며 꽃을 피웠고 다양한 크기의 화분에 여러 종류의 꽃들도 활짝 피었습니다. 그 앞에 자리를 깔고 놓은 탁자에 김 군이 비스듬히 팔을 걸치고 누워 온종일 꽃만 바라봅니다. 그 모습을 강아지 청화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이 없어 쉬는 날이면 김 군은 이렇듯 하루 종일 꽃만 바라봅니다. 행여 손님이 와도 꽃이 피는 모습을 놓칠세라 금세 자리를 뜹니다. 이런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은 김 군을 미치광이라며 손가락질하고 조롱했습니다.

황홀할 정도로 등나무꽃이 만개하였습니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등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화려한 날개를 가진 나비가 찾아들고 메뚜기 한 마리도 등나무꽃줄기에 달라붙어 여흥을 즐기고 있습니다. 만개한 등나무 아래 진정으로 꽃을 사랑하는 김 군이 누워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머리 뒤로 두 팔을 괸 채 책과 부채를 내려놓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벗어 놓은 고무신이 앙증맞아 보입니다. 그 곁에 있는 청화도 노란 꽃을 물고 있습니다.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들이 꽃을 틔울 준비를 하고 성격 급한 녀석들은 벌써 진분홍 꽃잎을 활짝 펼칩니다. 봄을 알리는 진달래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김 군의 꽃사랑도 기지개를 켭니다.


뜨거운 햇살을 먹고 자란 초록 잎과 그 잎에서 태어난 푸른 꽃이 대조를 이룹니다. 김 군이 어루만지는 초롱꽃은 더위도 잊게 만드는 푸르름으로 한여름을 풍성하게 합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코끝에 집중합니다. 시나브로 가을 국화 향이 김 군을 더 섬세하게 합니다. 나비들도 가벼운 날개를 펄럭이며 은은한 가을 향의 향연에 빠져듭니다.

가지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습니다. 매서운 한파와 날카로운 겨울바람도 겨울 매화의 고고한 자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목도리를 두르고 양손을 옷소매에 넣은 김 군이 겨울을 녹여버릴 듯한 붉은 매화꽃을 바라보며 봄을 기다립니다.


방석 위에 앉아 허리를 곧게 세우고 깍지 낀 양손을 가부좌한 다리 위에 사뿐히 올려놓습니다. 김 군 앞에는 낮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문진으로 고정한 종이, 먹과 벼류, 붓이 놓여 있고 여러 색의 물감과 물통이 보입니다. 김 군은 온화한 표정으로 정면을 지긋이 바라봅니다. 김 군이 바라보는 곳에는 연분홍 꽃을 곱게 피워낸 나무 한 그루가 도자기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마당에서 자라던 꽃들이 이제 김 군의 붓끝에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줄기부터 잎사귀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색을 입혀 나갑니다. 알차게 여문 꽃봉오리와 만개한 진분홍 모란이 마치 살아있는 듯 그의 화폭에서 되살아납니다.


자줏빛 꽃술을 가진 하얀 모란, 분홍과 빨강 그리고 두 색이 어우러진 패랭이꽃, 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까지 김 군의 두 눈은 꽃을 그리고 마음으로는 잎을 그려 나갑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거나 때론 일어서서 커다란 화폭에 색색의 꽃들을 채워 넣습니다. 코스모스와 양귀비, 모란꽃이 형태를 갖추고 색을 찾아갑니다.


다음 장에는 책이 양쪽으로 펼쳐져 네 쪽의 장면이 하나의 화폭으로 변신합니다. 작은 구석이라도 김 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꽃과 함께라면 미친 사람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꽃에 대한 그의 열정이 화폭 가득 채워집니다. 꽃이 피니 나비와 잠자리, 여러 종류의 새도 날아듭니다. 꽃에 미친 나머지 꽃의 일부가 된 김 군이 뒷짐을 진 채 고요히 꽃 속에서 꽃을 바라봅니다.

거대한 화폭에 꽃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 앞에는 팔레트로 쓰는 접시들과 물감, 붓, 먹과 벼루 등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빈 방석만 덩그러니 놓인 채 어디에도 김 군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평생 제 몸과 마음처럼 꽃을 아낀 김 군은 그렇게 꽃이 되었습니다. 활짝 핀 한 송이 꽃이 되어 꽃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직접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꽃이 된 그에게 찾아옵니다.

동양화의 전통에 현대적 감수성을 담는다는 작가는 조선 후기 화가 김덕형을 모델로 삼았고, 꽃과 식물 그림에 능했다고 하는 김덕형의 책 <<백화보>>는 그 존재만이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의 <백화보서>에 남아있을 뿐 <<백화보>>의 실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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