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있나

700번 모작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드가

by ODG

광고 대행사 2층 회의실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김 과장이 칸 광고제에서 돌아온 날이면 특히 그랬다. 그는 전시장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빔 프로젝터에 띄워놓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그랑프리 받은 캠페인 봤어요? 완전히 다른 차원이더라고요. 우리도 이런 거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고 누군가는 질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회의실 구석 창가 자리에 앉은 도 대리는 말이 없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레퍼런스 이미지를 폴더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었다. 마 과장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뜰 때도 그는 여전히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냉소적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고집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 대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마 과장의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라 그 이미지들이 어떤 구도로 만들어졌는지였다.


마 과장의 이름은 에두아르 마네였고, 도 대리의 이름은 에드가 드가였다. 같은 회사 같은 팀이었지만 두 사람이 그림을 대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마네가 감각적인 한 방으로 클라이언트를 사로잡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면 드가는 레퍼런스를 수집하고 구도를 분석하며 밤새 스케치를 반복하는 조용한 실무자에 가까웠다.


거울 앞에 선 사람


드가는 마네를 깊이 동경했다. 마네는 붓을 한 번 휘두르면 캔버스 위에 생명이 깃들었고 클라이언트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파리 화단의 중심에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 드가는 그런 마네를 보며 자신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믿었다.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을 장악하는 감각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 드가에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분석과 훈련.


1868년 드가는 마네와 마네 부인의 초상을 그렸다.


마네와 마네부인의 초상, 에드가 드가 65 x 71 cm, 868~1869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마네 부인과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마네. 조용한 부부의 일상을 담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이 그림을 받자마자 아내가 그려진 부분을 칼로 잘라냈다. 드가는 이것을 자신의 시선을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크게 화를 냈다.

잘려 나간 캔버스를 돌려받은 날 드가는 마네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마네가 인정을 갈구하며 살롱의 문을 두드릴 때 드가는 무대 뒤의 어둡고 습한 연습실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700번의 모작


드가는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나보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는 이 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 거장들의 그림 앞에 앉아 그들의 선과 구도를 미친 듯이 베꼈다. 확인된 것만 700점이 넘는다. 푸생, 앵그르, 라파엘로, 르네상스부터 고전주의까지 인체의 구조가 어떻게 선으로 치환되는지 화면의 균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반복해서 학습했다.


누군가는 이를 창피한 모방이라 했다. 하지만 드가에게는 가장 숭고한 일 이었다. 그는 거장들의 모작은 단순히 그림을 베끼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다시 보는 훈련이었다. 700번의 반복을 통해 드가는 마네가 갖지 못한 해부학적 정교함을 손에 쥐었다.


<벨렐리 가족 >은 드가가 전통 회화를 얼마나 철저히 익혔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벨렐리 가족, 에드가 드가 200 x 253 cm 1858–1867


인물의 배치와 공간 구성은 고전적이지만 그 안에서 드가는 자신만의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아버지는 화면 밖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고 어머니는 정면을 응시하며 딸들을 감싸고 있다. 가족 초상화이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불화와 거리감이 흐른다.


드가는 이미 이 시기부터 표면 아래 숨겨진 진실을 포착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적 스승 앵그르가 말했다. "선에 충실하라." 드가에게 이 말은 종교가 되었다. 그는 선 하나하나에 의도를 담았고 구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드가의 크로키와 스케치 그리고 구도는 나중에 마네조차 인정했다. 결국 질투는 파괴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파내려 가는 예리한 정이 되었다.


사진이라는 실험실


19세기 후반 사진기의 등장에 화가들은 공포에 떨었다. 사진이 회화를 대체할 것이라는 불안이 화단을 휩쓸었다. 하지만 드가는 달랐다. 그는 사진을 회화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최고의 데이터 수집기로 삼았다.


회화와 사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사진의 새로운 시점을 회화에 적용했고 사진가들은 회화의 구도를 참고해 사진을 찍었다. 드가 역시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새로운 구도를 실험했다. 그는 사진이 보여주는 예상치 못한 시점, 잘려 나간 화면, 순간적으로 포착된 동작에 주목했다.


1878년 에드워드 머이브리지는 달리는 말을 연속 촬영한 <The Horse in Motion>을 발표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순간이 드러났다. 말의 네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그 1/1000초의 진실. 드가는 이 사진을 보고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말의 달리기 표현과 실제 움직임 사이의 차이를 깨달았다. 화가들은 오랫동안 말이 달릴 때 네 다리를 앞뒤로 쭉 뻗은 모습으로 그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네 다리가 배 쪽으로 모이는 순간이 있었다. 드가는 그 순간을 캔버스에 옮겼다.


사진의 잘려 나간 프레임 즉 크로핑(Cropping)은 드가에게 공간의 분할이라는 새로운 문법을 주었다. 그는 인물을 화면 구석으로 밀어 넣거나 신체 일부를 과감하게 잘라냈다. 관찰자는 마치 열쇠구멍으로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드가의 실험적인 구도는 이후 사진과 영화의 시각과도 닮아 있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도구 삼아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실내의 빛, 무대 뒤의 민낯


1870년대 인상파 화가들은 야외로 나갔다. 모네는 센 강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빛의 변화를 쫓았고 피사로는 시골 풍경 속 햇빛의 떨림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들은 자연광 속에서 색의 진동을 포착하려 했다. 하지만 드가는 실내에 남았다.


그는 외광파를 거부했다. 대신 실내조명으로 빛의 변화를 표현했다. 발레 연습실, 오페라 극장, 경마장. 드가가 선택한 공간은 모두 인공조명 아래 있었다. 가스등의 차가운 빛은 자연광과 달리 고정되어 있었고 그 빛 아래서 인물들은 반복적인 동작을 수행했다. 드가는 그 반복 속에서 인체의 구조와 움직임을 해부했다.

드가는 발레리나를 아름다운 요정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들을 무대 뒤의 노동자로 보았다.


<무용 수업 >과 <무대 위의 리허설 >를 보면 화면이 비대칭적으로 잘려 있다.


무용수업, 에드가 드가 85 x 75 cm 1873~1876


무대 위 발레 리허설, 에드가 드가 65 x 81 cm 1874

인물들은 화면 가장자리에서 등장하거나 사라진다. 어떤 무용수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고 어떤 무용수는 리본을 묶고 있으며 어떤 무용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전통 회화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던 방식이었다.


드가에게 발레 장면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었다. 인체 움직임을 연구하는 실험실에 가까웠다. 그는 무용수들의 동작을 반복해서 관찰하며 인체가 만들어내는 선과 균형을 기록했다. 같은 동작이라도 각도에 따라 빛에 따라 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형태가 나타났다. 드가는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열쇠구멍 시선으로 대상이 의식하지 않는 가장 정직한 동세를 채집했다. 무용수들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습에 몰두하거나 피곤에 지쳐 있거나, 동료와 속삭이거나, 선생의 지시를 기다렸다. 드가는 그 순간들을 포착했다. 가스등의 차가운 인공조명은 도시의 고독과 소외를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 세계


드가는 평생 비슷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다. 무희, 경마 장면, 목욕하는 여성. 이 반복은 단순한 소재 집착이 아니었다. 형태와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였다. 같은 대상을 수십 번, 수백 번 그리면서 드가는 인체의 본질에 가까워졌다.


특히 그의 파스텔 작품들은 지금도 독특하다. <푸른 무희들>을 보면 부드러운 색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방식이 보인다.


푸른 무희들, 에드가 드가 65 x 65 cm 1898


파스텔은 유화처럼 혼합할 수 없다. 그래서 드가는 색을 겹쳐 쌓으며 미묘한 색조를 만들어냈다. 푸른빛 위에 보랏빛을 살짝 얹고 그 위에 다시 흰빛을 스치듯 지나가게 했다. 이 색층은 오랜 관찰과 반복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였다.

드가의 파스텔 기법은 지금도 모방하기 힘들 정도로 독자적인 영역에 있다. 그는 물감을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서 직접 겹쳐 쌓았다.



모작의 끝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다 보면 모작을 할 때 스스로 창의성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레퍼런스를 모으고, 좋은 작품을 따라 그리고, 구도를 분석하는 과정이 때로는 초라하게 느껴진다. 내 안에서 나온 게 아니라 남의 것을 베끼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드가 같은 화가도 수많은 고전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의 눈을 단련했다.


700번의 모작은 창피한 게 아니라 혁신의 시작이었다. 거장도 이렇게 했다. 무언가를 지독하게 닮으려 노력하는 과정은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거인의 어깨를 빌리는 것이다. 그 반복 속에서 드가는 자신만의 구도와 시선을 만들어냈다.


모작은 창의성의 부족이 아니다. 눈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기초가 탄탄한 자만이 변주할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드가는 알았다. 그는 700점의 습작을 통해 거장들의 기술을 자신의 근육 기억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서 새로운 문법을 썼다.


드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1/1000초의 진실을 찾기 위해 셔터를 누르던 그 마음으로, 밤새 선을 긋고 또 그었다. 예술은 우연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시작은 언제나 모작이었다.

드가는 모작의 끝에서 자신만의 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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