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아무나 하나?
공공과 사적인 환경, 그 차이의 경계에 서서
공적인 일을 추구하다보면 소위 말하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 된다. 처리해야 할 일들은 주로 수동적으로 내려받게 되고, 대부분이 법이나 제도내에서의 한정된 양식에 의해 정해진 형식대로 행하는 과정이다. 사사로운 얘기를 듣게되어도 말할 곳도 없으며 기억해봐야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일을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건 그 과정을 얼마나 정확히 빠르게 해냈는가 하는 기능적 숙달일 뿐 그것이 경험에서 우러나는 성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찰이 되려면 그만큼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짧게 숙고하고 공적인 틀에 잘 맞추어졌는지는 시시때때로 점검해야하는 일...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다보면 자연스레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민망스러워 지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도 공감보다는 납득이나 이해 단계에 머무르는 정도가 된다. 그것도 눈코뜰새 없이 일과가 돌아갈때는 이타심을 발휘해야 가능하기에 어렵고 훌륭한 자세다.
평소 쉽게 쓰이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그럼 사사로운 공간이나 사적 네트워크 내에서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걸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가만히 있어도 일이 주어지기보다는 직접 먹이를 찾아 획득해야하는 능동성을 지녀야 사는 환경아닌가... 경쟁이 아니라고 해도 끊임없이 비교되고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며 손에 꼭 쥐어진 동앗줄을 놓지 않으려 노력해야 살아남는 게 아니던가...
상대방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사고력의 한계내에서 이성이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로서 상황을 완벽히 전달할 수 없듯이 겪지않고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제대로된 공감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공감이라는 능력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바로 어떤 감각이 전이되거나 간접경험에 의해 순간적으로 몰입해 만들어내는 연기력에 가까운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 추상성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 아픔을 누군가 공감해주지 않는다고해서,
내 감정이 무시당하고 보살펴지지 않는다고해서,
공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친구를 잃는다해도...
크게 자책하거나 누굴 탓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그런가보다... 그냥 가던 길을 묵묵히 계속 가면 되는 일일 터이다.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고 기쁨은 두배가 된다지만, 굳이 나누면서까지 감정을 키우고 싶지 않은 요즘이다. 감정표현이 격하면 현대사회에선 경계대상으로 분류되기 쉽다. 말도 유창하면 순간적으로 똑똑해보이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남기는 생채기도 함께 늘어나기에 아껴야한다고 배우기도 하니까... 감정도 그렇게 아끼고 간직하는 습관을 다져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