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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쓰기까지

무명작가의 인생사2

by 스무디


오늘 아침에 꿈을 꿨다.

아침 꿈은 흔하게 꾸는 편인데 희한하게도

그날의 일상과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종종 있다.


예를들면 이수만 얼굴이 나온 날

인터넷 뉴스에 그의 재산에 관한 얘기가 크게 실렸다.


민희진 씨가 나온 날은

인터넷 뉴스에 그 기사가 메인이었다.


오늘 꿈에 등장한 주인공은 교대시절 과동기로

거의 모든 강의와 과제들을 함께해온 그룹의 일원이라 단짝같은 느낌의 동갑내기 친구였다.


학교 교무실에 앉아 고생하며 관리자에게 질책을 받다시피 하는 분위기였다. 연고대, 이대, 서울대 정도를 나오거나 유학이나 고시 등을 치르가 온 동기들이 다수 있던 시기였다.


나는 꿈 속에서 그 친구가 꽤나 능력있고 영특했다는 걸 알리고, 관리자는 놀란 눈치로... 그렇게 깨어났다.

차마, 아침 바삐 출근중일까봐 친구에겐 연락하지 못했다.


그때 함께 하던 그룹원중에 가장 공부를 잘 했던 일원은 일찌감치 학교대신 다른 업종을 전전했다.

그 친구가 꿈에 등장했을 때도 내게 다가올, 전혜 계획한 적 없는, 하지만 가야하는, 다른 세계에 관한 예지몽같은 효과가 있었다.


꿈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때 가장 어렸던 동기는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때 새벽꿈에 나타나 많이 아프다고 했다. 좋은 얘기도 아니라 그때도 말하지 않았는데, 한참 시일이 지나 모임에 나가니, 그때 쯤에 쓰러졌었다고 들었다.


오늘 등장한 내 친구를 향해 여기에서나마 화이팅!을 보낸다. 그리고... 이런 예지몽 비슷한 것들이

둥지를 떠나 모험하는 참새같은

내 신세에 적잖이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연예인도 꽤 많이 등장했고

대통령도 몇분 오셔서 내가 애들 보는 유치원에 오시기도 하고, 학교로 돌아오라고 하시기도 했다.


그럴땐. 생각한다. 이건 내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교육의 일환이구나, 글을 쓰고 드라마를 짓는 일이 완전한 전업이 아닌 그 성장의 연장선에 있는 거구나.


1화에서 쓰다가 만, 교대시절 이사 얘기를 이어서 하고 마치려한다.

그렇게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던 살림에 집착하며 신혼집을 우두커니 지키는 것이 그닥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공기정화용 식물들을 잔뜩 사다놓고 기르긴 했지만 어른들은 아기가 생기면 소용없을 거라고 말씀들을 해주였다.


가장 아끼던 벤치부터, 집을 보러온 분들이 마음에 든다며 팔라고 하셔서 저렴히 드리기로 하였다.


그외 색깔이 묻어나던 화려한 쿠션도 치우기로 했다. 화분도 줄이고, 동화책을 보러 서점에 다녔다.


아기를 가지기엔 학과공부가 힘들까봐 초조하고 걱정이 되었지만, 먼저 육아하며 다니고 계신 언니들이 본보기가 되어주었다. 집안에서 첫째를 원하시는 걸 알고 굳이 여의사가 계신 산부인과를 찾아가 상담을 했다. 그땐 전문가의 조언이 절실했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이사를 가고 싶었다.

남편이 늦게 퇴근해도 쓸쓸하지 않을만큼

작고 아늑한 집이었으면 했다.


마침, 학교 근처에 낮은 층의 아파트에, 놀이터엔 아이들의 목소리가 재잘재잘 매일 들리는...

바로 앞 화단에는 나무가 그집 발코니까지 올라와 우거져보이는, 정겨운 집이 나와있었다.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가장 큰 화분이었던 야자수 나무와

산세베리아 같은 공기정화용 식물들은 가지고 갔다.


만식이 되어오자, 갓난아기를 돌보기 전에 초등학생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학교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해도 실전이 없으면 불안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서 과외를 구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부진해진 수학을 연습시켜서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였다.


학부모님과의 약속이 있어어 자세한 정보나 내용은 잊었다. 그때 배웠던 교구 활용, 리포트에 써내던 학생과의 상담방법 등의 나름 연구노하우를 풀어놓으려 했지만 준비시간만 오래 걸릴뿐, 원하는 사람도 효과도 없었다.


교대에서 배우는 건 주로 아이들의 성적향상이 아니었다. 사실 그건 평가의 의무가 있긴 하나 전혀 교육적으로 추구하는 방향도 목표도 아니라서...

학생 개인의 선택과 지향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땐 과외교사였다.

의뢰인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거면

물러나야한다고 생각했다. 성적을 올려주는 건 내가 할 역할이 아니거나 학생과 안 맞는 성향이라고 위안했으나... 학습자의 성향을 파악해 내가 대화와 진도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맞춰야하는 거였다.


그건 책이나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경험과 연구로... 터득해 나의 머리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노하우가 되는 감각이 있어야하는 거였다.



그때, 이미 과외를 여러번 해본 친구들이 학과에도 많았었는데,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며...우선 내게 주어질 뱃속의 아기를 키우는 일에 몰두하기로 하며, 마침 출산시기에 교대 농성으로 휴강이 이어지자 시험날만 가서 치르고 돌아와 다시 몸조리를 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휴학없는 4년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겁많고 고지식한 성격에 그렇게라도 살으라고, 하늘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태어난 아기는 종알종알 갓난쟁인데도 옹알이를 하는 것 같았다. 잠도 없이 호기심은 어찌나 많은지 그때부턴 한눈팔 시간도, 심심할 틈 없는 맹훈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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