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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Oct 22. 2023

루나, 이사(移徙) 오다

-루나 5-1

 누구에게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은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던 12월 초, 그날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평범했다. 하늘이 파랗게 맑았던가? 왠지 얼굴에 스산한 바람이 스쳤던 것 같기도 하다. 


 “야옹”

 사료를 가지고 구청 주차장 급식 터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높은 고음의 고양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얼굴을 드러낸 고양이는 젖소 고양이였다. 순간 루키인가 했지만 루키보다 까만색이 더 많고 배트맨 가면을 쓴 것처럼 눈 위쪽으로 까만색 무늬에 눈이 유난히 동그랗다. 눈 밑과 배와 팔다리는 하얀색에 등 쪽 아래는 마치 치마를 입은 것처럼 까만색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야옹 하는 데다 사람을 피하는 기색도 없다. 

 왜 갑자기 루카가 떠올랐을까? 루카도 저렇게 눈에만 까만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배트맨 고양이는 말이 많았다. 밥을 주어도 먹지 않고 내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야옹댔다. 개냥이가 틀림없었다. 요즘 왜 이리 개냥이가 많은 거야! 동물 학대자들의 위험 때문에 길고양이들은 개냥이가 되면 안 되는데. 

 월요일 아침, 나는 다섯 번째 고양이 강치를 본의 아니게 입양하게 된, 정신없던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터였다. 두 달 전 공원으로 간 루키가 살던 주차장에는 그동안 얼굴을 보인 고양이가 없었지만 나는 혹시나 루키가 다시 돌아올까 싶어 급식 터에 계속 밥을 주었다. 루키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밥은 항상 없어졌고 나는 지나가는 고양이가 있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이 배트맨 고양이가 왔다 갔다 하다가 맘에 들어 살려고 온 것일까?

 공원에 사료를 주고 돌아오면서 다시 주차장에 가보았다. 여전히 거기서 야옹거리고 있다.  루카를 닮은, 사실은 루카보다 더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이 고양이에게 나는 만나자마자 빠져버린 것 같다.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루나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겨울 집까지 주문했다. 눈은 동그랗게 컸고 말이 많은 모습이 귀여웠다. 길고양이답지 않게 몸집은 크고 약간 통통하기까지 했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묘였다. 퇴근 후 저녁에 가보았더니 없다. 어디로 간 거지?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나는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급식 터에 젖소 무늬 고양이가 보였다. 그런데 루나가 아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너 왜 돌아온 거야?”

 루키는 천연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발밑에는 조그만 생쥐 사체가 두 마리나 나동그라져 있다. 설마 선물까지 가지고 돌아온 거야? (*고양이들은 종종 애정 표현으로 선물을 한다) 공원에서 두 달이나 살았는데?

 “지금은 돌아올 때가 아냐. 어제 우리 루나가 이사 왔다고.”

나는 원망스럽게 루키를 바라보았다. 공원에서 엄치와 2개월을 살았던 루키가 돌아온 것이다. 지난주에 새로운 갈색 태비 고양이가 공원에 나타난 이후다. 태비 고양이는 몸집은 크지 않았으나 성묘였고 아직 중성화되지 않은 채였다. 새로 온 고양이는 내가 루키를 위해 마련해준 집을 차지했다. 

 아침에 급식을 주고 나오니 그 집에서 루키가 아닌 그 갈색 고양이가 나오는 게 보였다. 그 집은 원래 구청 주차장에 있었는데 루키가 이사 가서 공원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었다. 한동안 루키와 엄치, 엄치의 아기들, 까치, 또치까지 살았었다. 그런데 이제 엄치까지 갈색 태비와 같이 다녔다. 루키가 연애에서도, 싸움에서도 밀린 건가? 아무래도 중성화된 고양이는 수컷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성격이 순해지게 된다. 그랬다 해도 두 달이나 공원에서 살았던 루키가 다시 구청에 돌아올 줄은 몰랐다. 

 사실 나는 지난주까지도 루키가 돌아오기를 원했다. 공원에 있는 동안 루키는 공원에 사는 고양이들을 공격해서 싸웠다. 공원이 루키가 나타나서 시끄러워진 것 같았다. 루키가 구청으로 돌아오면 공원은 다시 평화로워질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구청은 공원보다 안전한 것 같았고 혼자니까 싸울 일도 없다. 공원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루키를 위해서도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루나가 나타난 그 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만난 지 단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루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루키라니! 루키는 생쥐까지 가지고 왔다. 공원 생활을 정리한 것 같았다. 2개월간의 엄치와의 행복한 생활이 이렇게 쉽게 끝날 수가! 루키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루키보다 전날 처음 만난 루나가 더욱 걱정되었다. 

 “루키, 네가 돌아오면 루나가 여기 살 수가 없잖아.”

나는 루나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봐서 조바심이 났다. 같이 살면 좋겠지만 성묘들은 영역싸움을 해서 자기 영역에 다른 고양이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경우가 많다. 1년 넘게 루키를 지켜보아서 알지만 루키는 성격이 사나운 편이다. 이런 루키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고양이를 가만 놓아둘 리가 없다. 루나는 눈도 얼굴도 동그래서 순해 보였다. 암컷인가?


 “아! 루나네. 루나야!”

 점심시간, 허리 밑의 까만 치마 무늬를 확인하고 나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루나는 하루 만에 나를 알아보는 듯 내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마침 겨울 집이 배송이 와서 나는 바로 설치를 해주었다. 저녁에 다시 가보니 이번엔 루나가 없고 루키가 있다.

 설마 루키가 쫓아낸 건 아니겠지?

나는 고민 끝에 겨울 집을 하나 더 주문했다. 집이 두 개이고 밥도 많이 주면 루키와 루나가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살 수 있지는 않을까? 아무래도 한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을 것 같다. 루나가 나타난 그 주가 가기 전에 나는 주차장 한편에 겨울 집 두 개와 급식 터도 새것으로 교체해주었다. 

 “루키야! 루나랑 싸우지 말고 같이 살자. 집도 두 개잖아.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줄게”

나는 우리 집 고양이를 주려고 사놓은 간식을 매일 아침 가져와서 루키와 루나에게 주었다. 루키와 루나는 같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어쨌든 그래도 두 개의 집에 각자 잘 사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나가보면 루키는 나가고 없고 루나는 그때까지도 겨울 집에서 자고 있을 때가 많았다.


 “정말 친해진 거야? 같이 놀고 있네! 하하”

 루나가 나타난 지 일주일쯤 된 것 같다. 퇴근 시간에 주차장에 가보니 루키와 루나는 같이 뛰어놀고 있다. 간식을 꺼내주었더니 함께 다정하게 먹었다. 놀랍게도 루키와 루나는 서로를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이 밥 먹고 산책도 같이 다녔다. 원래 사나운 루키라서 걱정했는데 루나의 애교에 무장 해제된 건가? 루나는 루키에게 그루밍도 해주고 살갑게 구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키와 루나는 더욱더 친해지는 것 같다. 마치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같이 다녔다. 루나가 나타나면 곧 루키가, 루키가 나타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루나가 나타나곤 했다. 둘 다 젖소 무늬 고양이여서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좀 더 검은 무늬가 많고 좀 더 얼굴과 몸이 동그란 녀석이 루나다! 나를 보고도 가만있으면 루키고, 양양하면서 달려오면 그건 여지없이 루나다. 

 루나는 뛰어와서 얼굴을 비비고 바닥에 구르면서 야옹거리며 손까지 핥아주었다. 이런 최최고 개냥을 어떻게 안 예뻐할 수가 있겠어. 집냥이도 이런 개냥이는 드물다. 하물며 길에서 이런 개냥이를 만날 줄이야. 나는 이제 담요를 가지고 다녔다. 루나가 구를 때 깔아주기 위해서였다. 만나기만 하면 구르기 때문에 담요를 안 가지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랬어도 루나의 하얀 털은 흙먼지에 거의 갈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루나의 왼쪽 귀가 커팅되어 있다. 이미 중성화되어있고, 수컷이다. 엉덩이 쪽의 땅콩(*수컷의 성기로 땅콩 모양이라 이렇게 부름)이 보였다. 

 어디서 이사를 온 걸까? 루나! 이렇게도 개냥이라면 유기 묘인가? 하지만 귀커팅이 되어있는 것은 길고양이라는 증거인데? 아니면 진짜 잘 돌보는 캣맘이랑 같이 있었던 것일 거다. 루나는 통통하고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다. 

 “루나야. 너 왜 이사 왔어? 이렇게 귀여운 루나가 어떻게 이사 왔을까?”

나는 아침마다 루나에게 물어보았다. 루나는 골골하면서 내 손을 핥으며 양양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루나의 과거가 너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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