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진실하지 않다면 만날 수 없다
제4편- 진실하지 않다면 만날 수 없다
학교를 나와 횡단보도를 건넜다. 커피 전문점 하이델이 보인다. 하이델 앞 계단에 키 큰 남자가 앉아있다. 락이다. 낭패다. 홍 선배와 민철이 같이 있다. 난 홍 선배와 민철에게 빨리 가라고 밀었다. 민철은 영 석연찮은 표정으로 걸어간다. 그들이 간 후 나는 뒤돌아 다시 락에게 간다.
“왜 여기 있어? 들어가 있지.”
락은 일어서며 말한다.
“자리가 없어. 누구야?”
나는 아는 사람들이라고 얼버무린다. 같은 재수학원 사람들이라고.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만남 이후 나는 락에게 연락을 끊었었다. 더 이상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짓된 만남으로 감정이 깊어진다면 안되기 때문이다. 처음 한 달간은 괜찮았다. 락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락이 보고 싶었다. 결국 석 달만에 나는 락에게 연락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우리는 근처 민속주점으로 들어간다. 금요일 저녁이라 사람들이 많다.
“너 파마했어?”
나는 락에게 물었다. 삼 개월 만의 모습이 어색하다. 내 기억 속의 락의 머리보다 더 곱실거리는 머리, 더 큰 키, 뭔가 다르다.
“파마는 무슨. 10달 파마잖아. 엄마 뱃속에서 10달 말고 있었어.”
나는 웃는다. 락은 나를 유심히 본다.
“머리 잘랐니? 너 더 어려 보인다.”
삼 개월 전 그때는 머리가 어깨에서 더 내려와 있었다. 커트로 머리 자른 지 한 달쯤 됐다.
“실연당하면 자르는 거잖아. 나 그래서 잘랐어.”
락은 웃는다.
나와 락은 마치 지난 삼 개월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농담하고 웃었다. 2차로 간 커피전문점에서 락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 너 전에 왜 헤어지자고 한 거야? 진짜 내가 결혼하자는 것 때문이야?”
나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널 속이고 계속 만날 수 없어서라고. 하지만 지금도 널 속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락은 이제 무척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주일 뒤 나는 은선 언니가 소개해준 치킨 집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다. 락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매일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항상 시간이 없었다. 치킨집 알바가 끝나는 10시에서 30분 후 지하철 막차를 타야만 집에 갈 수 있다.
락은 매일 10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서 지하철까지 태워다 주었다. 전에는 10분이었지만 이제 오토바이로는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나는 락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걸을 때와 다르게 오토바이 위에서는 가을바람이 훨씬 찼다.
매일 나타나던 락이 열흘째 보이지 않았다. 궁금했지만 너무 바빠서 전화를 하지 못했다. 학교 수업과 학생회 모임 그리고 알바까지 하루 종일 뛰어야 했다. 집에 가면 12시가 넘어있어서 공장에 전화할 수도 없다.
그날도 치킨 집에서 서빙과 주문을 받느라 바빴다.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어찌 된 일인지 오토바이도 없이 오른쪽 팔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락은 다쳐서 잔업도 할 수 없었는지 알바가 끝나기 두 시간 전에 왔다.
“어떻게 된 거야?”
“오토바이에서 굴러서 떨어졌어.”
난 그가 몹시 걱정되었지만 바빠서 제대로 상처를 보지도 못했다. 10시가 되어서야 락과 나는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그동안 항상 밝고 웃던 락이 아니었다. 힘들어 보였다.
락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나타난 차 때문에 급정거해서 공중에 붕 떴다가 떨어졌다고 했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팔목만 부러지고 다리는 타박상이라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지하철까지 조용히 걸었다. 농담만 하던 우리에게 진지한 분위기는 낯설기만 했다.
“나 내일 거제도 내려가기로 했다.”
“정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공장도 그만두었다. 몇 달간 서울에 안 올지도 몰라.”
“진짜?”
락은 나를 바라보았다.
“민아 전화번호 어떻게 돼?”
아직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나는 전화번호를 줄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연락 안 될 거야.”
락은 내가 일부러 전화번호를 안 주는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었다.
“팔 나을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몸조리 잘해. 건강해야 행복하대. 항상 건강해야 해”
나는 이제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인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니 또 한 번 의도하고 있었다.
“민아 너 마지막 인사 같아.”
락은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실할 수 없다면 계속 만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끝내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 지금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잘 가”
밑에서 락이 큰소리로 외쳤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락이 오래도록 그곳에 서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 락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거제도에 살까? 서울에 살까? 아마도 우린 만나도 얼굴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우린 그냥 스쳐 지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