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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 가방 공장

제3편- 다시 만난 락

by 민하

제3편- 다시 만난 락


오후 4시, 벌써 락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난 사회자인 홍 선배를 자꾸만 바라보았다. 홍 선배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토론을 마치고 모임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번 책은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입니다. 다음 주까지 읽어 오시고 함께 토론 진행할게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집부 독서모임이었지만 다른 때와 다르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창밖에 파릇파릇한 잔디밭의 꽃들과 팔랑거리는 나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어디 가냐는 홍 선배와 석준을 뒤로하고 학교를 가로질렀다. 사범대 언덕을 넘어 도서관을 지나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열심히 뛰었지만 20분이나 늦었다.

스포티한 모습의 남자가 지하철 근처의 상가 벽에 기대 있다. 락은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조금”

“자습이 좀 늦게 끝나서.”

내 말에 락은 웃었다.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락은 내 어깨에 손을 얻었다.

“아니. 너는 밤까지 일하잖아. 너보다 힘들지 않아.”

락과 나는 함께 다시 학교로 갔다. 학생회관에는 저번 주까지 걸려있던 영화 포스터가 없다. 가방에 있던 영화 티켓을 보니 날짜가 지나있었다. 끝나는 날짜를 확인하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상영기간은 어제로 끝나 있었다.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라 좀 바빴었고 알바까지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지난주 학생회관의 건물에는 커다랗게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라는 제목의 독립영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선원들의 힘든 삶을 그렸다고 했다. 나는 이 영화야말로 락에게 꼭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원양어선은 돈은 될지 몰라도 정말 너무 힘들 것이다.

나는 원양어선에 대해 잘 몰랐지만 대충 죽을 정도로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락이 그렇게 힘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말했을 때 락은 나의 불순한?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순순히 오겠다고 했다.

락은 내가 이 대학교 근처의 입시학원에서 재수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친했던 대학 친구에게 티켓을 얻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한 달 전 공장 활동 이후, 월급을 타러 갔었다. 락과 은선 언니는 나를 보고 작업복인 채로 나왔다. 은선 언니는 자기한테도 말도 안 하고 그만둔 것에 대해서 서운해했다. 나는 갑자기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장을 그만두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대학을 떨어져서 포기했다가 다시 가기로 결심해서 그만둔다고 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만나지 못할 거라고까지 말했다.

“너 다른 이유가 있지?”

락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날 나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는 노래방도 가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뭐야, 좋은 영화 보여준다더니.”

“그러게. 미안. 어떡하지”

우리는 갑자기 허탈해졌다. 일요일 오후다. 5월이라 날씨는 따스했고 산들바람이 불었다. 학교의 호수는 파랗게 빛나고 있고 그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멀리 펼쳐져있다.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았다.

“대학로 갈까?”

나는 갑자기 말을 꺼내며 락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락은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하철에서 우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곧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했다. 연한 회색부터 진한 회색까지 갖가지 무채색의 비둘기 떼들이 누군가가 뿌려준 팝콘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는 기타를 치는 거리 공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잠깐, 공연하는 사람들 앞에 앉았다. 산들바람은 상큼한 아카시아 향기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나 좋아? 민?”

락은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우린 만나면 항상 농담만 해오던 터였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잘 몰랐다. 아직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락과 은선 언니를 계속 만나기로 한다면 그들에게 솔직해야만 한다. 그들이 나에게 숨김이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들에게 거짓을 말해선 안 된다. 그들에게 내가 사실은 락보다 한 살 많고 이름도 민이 아닌 혜민이며 재수생이 아니라 대학교 4학년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락과 은선 언니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는지, 왜 계속 대학생인 것을 숨겼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난 락이 좋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난 최대한 무성의하게 대답하려고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락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잖아. 너 나를 좋아하지? 그렇지?”

락은 계속 장난을 쳤다. 계속된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우리 결혼할래?”

락은 진지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바람에 나도 얼굴이 상기됐다.

“말도 안 돼, 우리 아직 어리잖아.”

나는 정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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