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아무도 모르는 이별
제2편- 아무도 모르는 이별
“잘 다녀와 민.”
“은선 언니도 잘 다녀와요.”
모두들 가볍게 인사했다. 설날이라서 며칠간의 휴가가 예정돼있다. 점심시간까지 작업을 마쳤다. 시골집에 다녀올 사람도 있었고 서울에서 제사 지내고 휴일을 보낼 사람들도 있다. 언니들과 인사를 마치고 공장을 나왔다. 락은 커다란 가방을 챙겨서 함께 나왔다. 설을 보내려 거제도로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로 가는 길에 우린 10분 동안 함께 걸었다. 락의 생일 이후 5일째였다.
“민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와. 뚱뚱해지면 안 돼”
락은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더 이상 크면 안 돼. 지금도 충분히 컸거든.”
나는 키 큰 락을 올려다보았다.
락은 어제 커다란 원양어선을 타러 가야겠다고 말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실 공장에서는 돈을 벌 수가 없었다. 나는 어제 락을 말렸었지만 오늘은 농담으로 말했다.
“배 타서 좋겠다. 너 배 좋아하잖아”
“하하. 거제도 갈 때 배 안타. 육지랑 연결돼있어.”
“정말? 이런. 거기 섬 아닌 거야?”
벌써 10분이 지나 지하철역이 보였다. 락은 지하철역에서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었다. 약간 긴 곱슬머리가 햇볕에 빛나 연한 금빛으로 빛났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돌아서면서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락과 은선 언니와 공장 사람들은 설 연휴가 끝나고 나서 출근할 때 내가 없어서 실망할까?
4주로 예정돼있던 나의 공장 활동이 이제 끝났다.
대학 3학년 겨울방학, 학생회관 현수막에는 ‘공장 활동 모집’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어차피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그동안 사무보조, 카페 알바, 텔레마케터, 과외 등 많은 알바를 했지만 공장 활동이라는 것은 왠지 다를 것 같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노동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노동자의 삶에 다가가고 싶었다.
우리는 공장 작업이 끝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토론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4명이 참여했다. 우리가 대학생인 것을 밝히지 않았던 것은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대하는 시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는 노동자의 삶에 대해, 노동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을 터였다.
공장 활동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것은 성공할 수 없는 미션이었다. 4주간의 짧은 생활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우리는 단지 첫눈만을 맞았을 뿐이었다. 첫눈을 가지고 겨울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락과 은선 언니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이 좋았다. 그들은 자기의 감정표현에 솔직했으며 계산하지 않았다. 힘든 생활임에도 심각하지 않았다. 험악한 늑대가 가득한 산에 던져진 양이었지만 항상 웃을 줄 알았다. 오히려 우리는 학생이라는 보호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진 것 같은 고민을 가지고 살아갔다.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짐을 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같은 나이였지만 그들은 공장에 있고 나는 대학에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에 의한 결과였다. 내가 락이나 수정처럼 거제도에서 태어났더라면 거제도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지 운에 의해서 우리의 길이 달랐던 것이다.
락은 순수한 남자다. 은선 언니는 너무 친절하고 사랑스럽다. 나는 락과 은선 언니와 함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쩌면 상상하지도 못한 무언가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시작하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휴학하고 계속 공장에서 일할까도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마지막 대학 4학년의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차피 4주로 계획된 일이다. 은선 언니나 락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행이다. 우린 단지 4주밖에 보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말 한지는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없어도 별일 없을 것이다. 잘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야만 되는 걸까? 이제 나는 락과 은선 언니, 수정과 재민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의 삶을 아는 것은 포기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냥 공장에 다니지 않더라도 연락해서 친분관계를 유지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린 서로 무언가 통했었는데. 하지만 그들을 속였다는 자책감이 계속 나를 가로막았다. 난 이미 지하철에 타서 보이지 않는 락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