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떠날지 알 수 없다면 4편-
수술은 언제냐는 카톡을 보내 놓고 나는 기다릴 수 없어 전화기를 들었다. 한참 신호가 갔다. 복도로 나온 것 같다. 진희는 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수술은 할 수 없대.”
“뭐라고? 말도 안 돼. 수술을 해도 몇 개월 일지 몰라. 그런데 못한다고?”
내 목소리가 커졌다. 수술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제거하기 쉬운 뇌종양이라면 조직 검사할 때 제거한다. 위험한 부위에 있고 너무 크다면 다시 일정을 잡아 전문적인 인력을 마련해서 수술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석이의 뇌종양은 너무 중요한 부위인 뇌간과 뇌척수에 붙어있다고 했다.
다음날 휴가를 내고 병원에 갔다. 회진 중인 담당 의사는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에게는 체면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수술에 대해서 재고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의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미 종양이 커질 대로 커있어 수술할 경우 생명 자체가 위험하다고 다음 주부터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할 거라고 말했다. 의사는 짧은 말을 마치고 서둘러 다음 병실로 갔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복도에 서있었다.
의사를 함께 만나기로 했던 언니가 그때서야 왔다. 언니는 아이들에게 술과 담배를 하지 말고 게임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이건 아닌데.'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언니. 뇌종양은 원인이 없어. 소아암 중에 뇌종양이 많아. 만약 원인이 있다면 유전자적 변이라고 밝혀진 게 다야. 그건 석이가 아니라 우리 중 하나였어도 할 말 없다는 거잖아. 유전자를 받은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어쨌든 너무 무섭다.”
언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석이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오 남매 중 석이가 가장 젊고 가장 건강했다.
“석아. 사실…. 어쩌면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아. 이병이 아주 심한 거라서.”
그날 오후 석이의 정신이 약간 있어 보였다. 석이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 잘됐네.”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차피 움직일 수도 없고 누워만 있어야 하잖아? 좋은 방법으로 해결됐네.”
나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삼 주 전 만해도 팔십 오세 된 아빠의 건강을 함께 고민했었다.
“뭐 누구에게든지 하고 싶은 말 없어?”
석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오후에 방사선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최근 촬영된 CT와 MRI를 본 후 석이의 두 개 압(*머릿속 압력)이 너무 높아 치료 중 사망할 수도 있다며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서 다시 오라고 했다.
담당 주치의는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하라고 하고 방사선의는 하지 말라고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방사선 치료는 방사선을 쏘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마스크를 써야 한다. 딱 맞게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일주일이 더 필요하다. 게다가 방사선을 쏘일 때 환부가 아닌 다른 부분에 맞으면 안 되기 때문에 환자는 움직이면 안 되는데 가능하냐고 물었다. 사실 지금 석이는 자기 몸을 제어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 가능할까?
방사선 치료와 동시에 항암치료도 6주 동안 하게 된다. 항암치료란 테모달(Temodal)이란 약을 먹는 것이다. 이약은 캡슐 형태로 되어있는데 독성이 너무 강해서 가루가 손에 닿거나 혀에 닿으면 안 된다. 석이는 삼키는 기능이 퇴화하여 죽도 잘 먹지 못한다. 캡슐을 삼킬 수 있을까? 주사나 물약은 없다. 캡슐이 유일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진희의 전화가 왔다. 점심시간이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빨리 오라고 한다. 진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석이의 코에 호스가 꽂아있다. 이것 때문에 아침에 두 시간도 넘게 씨름했다고 한다. 석이는 남자간호사 두 명에게 둘러싸여 강제로 코에 호스를 삽입당했다. 그 과정에서 석이는 안 하려고 안간힘을 쓴 모양이었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 참담한 표정으로 석이는 누워있다.
전날부터 계속 토해서 죽도 먹지 못했다. 항구토제도 소용없었다. 더 이상 입으로 먹는 게 힘들어지자 병원에서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하는 것 같았다. 유동식을 호스가 달린 컵에 넣어 들고 있으면 높이 때문에 코에 꽂은 호스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입이 아닌 코에 의해 식사를 급여받게 되는 것이다.
진희는 이것만은 보류해달라고 했지만 병원에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며 환자가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계속 거부한다면 환자의 손을 침대에 묶어놓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석이의 침대 옆에 진희의 캐리어가 있다. 짐을 벌써 다 싸놓은 것 같다. 나는 조금만 참으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진희를 바라보았다.
“언니. 나 더 이상 못하겠어. 미안해. 간병인에게 연락해놓았으니까 금방 올 거야.”
진희는 도망가는 것처럼 아직 간병인이 오지도 않았는데 캐리어를 들고나갔다. 진희는 어릴 때부터 비위가 좀 약했다. 석이가 구토를 반복해서 옷도 치우고 담요도 갈았나 보았다. 진희는 결혼한 지 꽤 됐지만 아기가 없어 기저귀를 갈거나 토한 것을 치워본 적이 없다. 아기 둘을 키우며 항상 그런 일을 해본 나와는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희에게 너무 서운했다. 물론 그나마 진희가 와서 이만큼이라도 해준 것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가는 건 정말 아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힘들 때는 그런 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 않나. 동생에 대한 애정으로 이 정도는 극복할 수 있지 않나.
석이는 얼마나 힘들까? 지금 가장 힘든 건 진희도 나도 아빠도 누구도 아니다. 누구의 고통을 석이에게 비할 것인가. 석이는 옆으로 누워 침대 난간을 붙잡고 있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간호사에게 가서 진통제를 더 놓아달라고 했다. 간호사는 의사와 상의해야 한다고 한다. 의사 면담 신청을 했지만 두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도 없다. 나는 석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움직일 수 없는데도 석이의 몸은 고통으로 흔들렸다.
연변에서 온 한국말이 조금 서툰 간병인이 온 후 나는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진희가 가버렸어. 항암치료는 위험할 것 같아. 수술 없이는 석이에게 도움이 안 돼.”
언니는 그래도 병원에서 권한다면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석이를 생각해서 항암치료받으라는 게 아냐. 인터넷을 좀 봐. 항암치료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국가지원이 95퍼센트가 되니까 이건 무조건 돈이 돼. 환자들은 5%만 부담하면 되니까 경제적인 문제도 없고 그러니까 의사 말을 듣게 되잖아. 하지만 회생 가능성 없는 말기 암 환자에게 항암치료는 법적으로도 연명치료에 해당해.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수술도 못하는데 정말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잖아.”
나는 복도에서 언니와 한 시간 가까이 통화했다.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항암치료로 조금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언니는 끝까지 병원 편을 들었다. 나는 항암치료 조차도 위험하지만 정말 어떻게 잘 돼서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언니는 말했다.
“고통 있는 삶도 삶이지 않아?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화가 났다. 정말 왜 자기라고 생각을 못하는 걸까? 동생이잖아.
“그래. 언니. 엄청난 고통이라도 그 끝에 삶이 있다면 견뎌야 하겠지. 하지만 우리 알고 있잖아? 이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가능성도 없다면, 그렇다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아. 고통 속의 한 달, 두 달이 무슨 의미겠어. 오히려 그건 없는 게 나아. 만약 고통이 없다면 한 달 두 달 동안 내 삶을 정리하고 그럴 시간을 만들 수도 있지. 하지만 이건, 엄청난 고통 속에 있는 건 연명하는 것 밖에 안 돼. 만약 내가 이렇게 된다면 나는 그냥 죽게 해 줘. 그게 나를 돕는 거야”
언니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럽게 3주를 보낸 엄마가 떠올랐다. 사실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었다. 그런데도 살아있는 좀비처럼 그곳에 갇힌 많은 사람들과 엄마는 그렇게 죽어갔다. 차라리 고통을 덜어주고 마음의 평화를 주었어야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그날 밤부터 나는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호스피스에 관한 법률이 생긴 것이 2017년,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법률이 2018년이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의료계는 이 부분에 대해 보수적이다. 일단 호스피스 병원 자체가 많지 않다. 수도권과 서울에 몇 개, 그리고 지방 큰 도시 종합병원에만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찾다 보니 우리가 입원한 종합병원에도 호스피스 병동이 있었다. 의사는 그 병동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어 삼일을 못 넘기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수술도 할 수 없다면서 어떻게 회생 가능성이 있느냐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석이가 수술을 한다면 항암치료도 할 수 있겠지만 수술 없는 항암치료는 고통만을 가중시킨다고 나는 생각했다. 의사는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면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 한다.
수도권에 있는 모든 호스피스 병원에 전화해보았다. 모두 대기자가 밀려있다. 국가지원이 되니 이런 곳은 입원비가 저렴했다.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알아보았다. 요양원은 비싼데도 불구하고 의사가 상주하지 않는 곳이 많아 즉각적인 병원 치료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전에 직장 동료 중에서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했던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가 집에서 넘어졌는데 머리를 다쳐 혼수상태가 되어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의식이 돌아올지, 언제 죽을지도 몰랐다. 아무런 기약 없이 의식도 없는 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는 매일 요양원을 찾아갔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얼굴은 항상 어두웠다. 나는 그와 친했기 때문에 그가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을 알았다. 그의 어머니가 있던 요양원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와 나는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동생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안양에 있는 요양원 이름을 말해주었다.
“나 스위스(*적극적인 존엄사(약물투여에 의한 죽음)가 가능한 국가)에도 가려고 알아봤었어요. 목숨만 이어놓는 건 당사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고통일 뿐이에요.”
그때 내 전화기가 울렸다. 대기해놓았던 5개 호스피스 병원 중 하나였다. 그 병원은 약간 멀지만 산 밑에 있어 공기가 좋고 건물도 좋아 보였다. 병원에서는 갑자기 자리가 났다며 바로 다음날 입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고맙습니다. 내일 가겠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에 접수한 지 삼일 만에 자리가 났다. 진희가 힘들어도 며칠만 더 버텨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아니 나라도 휴가를 냈었어야 했다. 간병인을 바라보던 참담한 석이의 표정이 떠올랐다.
‘나조차도 너를 지켜주지 못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