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노동위원회 구제신청 &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 적응장애 산재요양 판정
2019년 7월 10일 조그만 제조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약 일주일전 대표 면접을 보러 갔을 때는 제법 뚱뚱한 50대 중반의 관리자가 나를 반겨주었다. 그 자리에서 곧장 합격 통보를 하였으며 당장 내일이라도 출근해 주기를 바랐으나 나는 단 일주일이라도 취업의 기쁨을 누리고자 1주일 후 입사를 요청하고 동의를 얻었다. 면접을 마치고는 갑자기 사무실에 있는 전체 직원들에게 데려가더니 나를 함께 할 '인사총무 담당자'소개하고 한명씩 인사할 시간을 주었다. 다소 놀라운 상황이었지만 이 업체로서는 신규 인사 채용이 아주 긴요함을 알 수 있게 한 부분이었다. 여성 직원 2명, 남성 직원 2명이 있는 10여명의 종업원으로 구성된 소기업이라 적응에 문제가 없을 것이란 자신감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해외영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외국 고객들과 커뮤니케이션 하고 제품 수주를 따오고 접대를 하며 프로젝트를 관리하던 영업 담당자였다. 5년간 재직하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할까 고민하다 자신이 없어 결국엔 또 취업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이 회사는 중국 천진 인근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는데 미중간 무역 전쟁으로 인하여 수출항인 부산항 인근에 우회 수출을 할 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참고로 나는 중국어와 영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단, 원어민 수준은 아니다. 이 회사는(앞으로 P사자라고 하자) 경영관리 담당자로 영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경력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인사, 노무, 총무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지만 나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2~3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회사 운영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2019년 12월 말일자 기준으로 50명이 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최대 인원일 것이라도 생각했다. 300평 남짓한 제조현장에는 탈북민도 있었고 조선족도 있었다. 또한 중국 본사에서 파견된 10여명의 기술자도 있었다. 모든 기계들을 중국 본사 공장에서 뜯어온 터라 그것들을 철거해 온 중국 직원들이 재설치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인건비와 외주 용역비용을 절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당시 20년차 중국 기술직원의 월급여가 1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으로 파견 나오면 급여가 최소 2배는 오른다고 들었고 내가 실제 한국 국세청에 해외소득 신청하면서 확인한 사실이기도 하다. 기계가 최대로 세팅되고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서자 2020년에는 단기 왕래하는 중국 본사 직원들의 규모가 1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주변 회사들에서 P사를 불법체류 외국인을 고용하여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으로 신고하여 20여명의 법무부 직원들이 불시에 공장을 급습하는 난해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2020년 회사는 기존 300여평의 공장을 그대로 운영하면서 부산시 산업단지 중 외국기업입주단지에 약 1만여평의 부지 임대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때부터 고난의 실이 열렸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사업게획서, 투자계획서, 입주계약체결, 근로자채용(~300명), 중국 본사 직원 관리/지원 등. 본인 1인에 이 모드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제조 현장에서 중국 본사 직원들이 한국 신규 직원들을 교육 훈련하는 것이 사실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언어 소통이 일체 이루어지지 않아 손발짓을 사용했고 답답한 마음에 중국 본사 직원들은 본인들의 권위를(본사에서 파견되었다는 우월 의식) 앞세워 발길질을 하거나 폭력을 쓰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 욕석을 끊임없이 해대었다. 이에 많은 한국 직원들이 입사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만두어 이직률이 급속도로 상승되어 갔다. 이 과정 속에서 한국 직원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적으로 중국 국적의 공장장과 반장들을 설득해 나섰지만 그 순간뿐 생산 최전선의 중국 오퍼레이터들의 의식은 변함이 없었고 변화할 가능성 조차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노조가 결성되었다. 매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의 폭력과 욕설을 버티지 못한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한 것이다. 사실 인사담당자였으나 속으로 축포를 쏘아 올렸다. 한국에서 실제 CEO를 하고 있는 실질적인 대표(나를 뽑아준)는 중국에서 20년동안 사회 생활을 하였으며 배우자와 자녀들 모두 중국 국적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배우자를 통해 이 회사에 CEO로 입사한 것이다. 중국 본사의 사장의 배우자와 CEO 배우자가 친구인 것이다. P사 CEO는 중국의 문물에 철처히 젖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본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구조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을 오랬동안 떠나 있었고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해 보지 않았던 CEO는 한국 제조업체의 제도와 노동관계법 등에 대하 무지하였다. 중국처험 토일 주말을 불문하고 근로를 시킬 수도, 하루에 24시간 근로자들에게 생산 지시를 할 수도, 공휴일에 강제로 근무를 시킬 수도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 이의 불가함을 본사에 보고하는 것이 고역이었을 것이라...
생산 직원들은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저녁 8시에 퇴근하는데 12시~12시반사이 30분에 한하여 휴식을 취하게 하고 생산을 이어나가게 하였다. 나는 근로기준법을 들어 근로자들에게 충분한 휴식 시간을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여 사내 제도를 확립하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 8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 휴일근로, 공휴일근로에 왜 150%, 200%의 가산임금을 지급해야 하는지 설명하는데에 6개월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1년 근속한 직원에게 15개의 연차를 지급해야 하고 이를 사측에서 사용에 제한을 둘 수 없으며 사용하지 못할 경우 이를 연차수당으로 지급해야 함을 설득하는 데에도 반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연차를 사용하는 직원들에게 평가를 낮게 주어 급여 인상과 승진에 불이익을 주기도 하였고 사전 통지없지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보직을 변경케 하거나, 안전교육 없이 위험한 공정에 투입하는 등 중국 관리자들의 만행이 끊임없었다.
안전교육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한달에 1-2명은 산재 요양에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실명한 50대 직원도 있었다. 2024년 3월 회사와의 싸움때문에 떠났으나 2025년 5월에는 P사 근로자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뉴스를 접했다. 야간에 이동식작업대에서 떨어진 근로자를 다음날 오전 출근자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울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사망자가 평소 약을 복용하고 있던 사실을 들어 근로자의 100% 과실을 주장하고 있단다. 직원을 언제나 갈아치울 수 있는 기계 부품 따위로 여기는 곳이었으니,,,, 이 기회를 빌어 사망하신 분은 물론 그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말씀을 전합니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10여명 직원이 있던 P사에 입사하여 인사/총무/경리/구매/기획 등 CEO가 자시하는 일이라면 모두 처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인사총무팀 안에는 본인 외 다른 직원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근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4곳 법인의 업무도 맡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회계/무역 직원들도 총 5개 법인의 업무를 하였고 CEO에게 반대의 입장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왜냐? 그 당시에는 P사 한곳의 업무가 90% 이상이었고 나머지 4개 법인의 업무가 우리들에게 많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중 무역 갈등이 심화되고 발주처 수가 증가함에 따라 4곳 법인의 업무에 이에 따라 늘어만 갔다. 하지만 회사는 관계사들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의 타사 근로를 당연시하였으며, 대부분의 조선족 사무직 직원들은 이에 아무런 반항없이 묵묵히 일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대표이사가 상이하고 지분 구조에도 여하의 관계가 없는 4개 법인을 관계사로 인정할 수 없었으며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별도 법인에 대한 근로 강요, 즉 갑질로 밖에 볼 수 없없다. 이를 관할고용노동부와 지방노동위원회에 고발하였다.
CEO와 중국관리자들은 시간을 불문하고 내게 연락을 해댔다. 카카오톡, 웨이신, 전화, 메일 등,, 즉시 대응을 하지 않으면 독촉을 해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김없이 지시 요청이 들어온다. 너무나도 숨이 막히고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즉시 답장을 하지 않으면 전화올 것이 분명하니, 정황을 파악하며 만족할만한 답변을 제공한다. 혹시라도 답변을 하지 않을 경우 다음날 전화를 받지 않은 사유나 즉시 답변을 하지 않은 사유를 물어봐서는 직원들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하였다. 일요일 새벽 6시에 전화가 울리기도 했고 1월 1일 신정 오전 8시에도 지시가 들어왔으며 가족들과 신나게 떠난 외국 휴양지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랑, 부모님, 친구들을 이런 나를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회사를 그만두라고 권유했다.
코로나 기간 중국 본사 직원들이 격리되어 있는 숙소에 밥을 사다 날르기도 하고, 160cm 47kg의 내가 평생에도 해 본 적 없는 수박 10통을 잘라서 현장으로 나르기, 50여명의 아이스크림 사다 나르기, 직원 숙소 청소하기, CEO 임대 주택 타일 수리보수 신고, 분리수거, 대표 가전제품 구매, 자녀 공부방 청소 등. 이들 일을 하면서 본인의 가치가 한없이 초라하게 보였다. 인사총무 관리 담당자인지 잡부인지 어느 순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어느 누구 고마워하거나 위로를 해 주지도 않았다. 입사 후 신생업체를 내 기업처럼 살뜰이 챙겨보고자 했던 발로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늘 이렇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응을 하니 모든 사람들이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물론 중도에 거절과 반대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은 나에게도 잘못이 없진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사 관계에서는 근로자가 '을'을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근무평가. 연봉인상, 성과급, 승진 등 때문이라도 실제적인 고충을 마음에 삭혀두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일반적인 근로자에 불과했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힘든 시기에는 중국 본사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던 김해공항이 폐쇄되어 인천으로 직접 픽업을 해서 싣고 내려왔다. 잦은 왕복 12시간 이상의 운전은 허리에 무리를 주기 시작하였다.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하느 오른쪽 다리가 엉덩이에 바늘로 쑤시는 것과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평소 근무시간에도 지나치게 많은 업무로 인하여 하루 3-4회 화장실을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휴식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있지 않느냐고? 구내식당은 나의 작업장과 마찬가지다. 내가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위탁업체를 관리하기 때문에 식당에만 가면 각종 문제 투성이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식사하러 갔다가 열심히 식당 관리자와 위생/청결상태, 식단 균형, 메뉴 선정, 직원 건의사항 들을 논하다가 식사시간을 놓치기 일쑤였다. 매일 7시 출근해 야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허리와 목이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게다.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내 집 드나들듯 하였다. 2022년 허리 통증을 참지 못하고 입원 시술을 받던 날이었다. 시술 후 누워 안정을 취하고 있던 나에게 CEO가 전화를 했다. 병가였던 만큼 시술 경과와 건강을 묻기 위한 안부 전화일 것으로 지레짐작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야 말았다. 변호사 계약서를 파일로 건네주며 오늘 중으로 검토 완료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나는 욕을 해대며 2~3시간안에 검토를 완료한 뒤 보고를 마쳤다.
2023년부터 집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계속 허공이나 벽을 보고 욕을 해댔다.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지껄이기도 했다. 내가 미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샤워할 때도 가관이다. 샤워부스 안에서 목이 터져라 욕을 해 댔다. 혹시 윗집이나 아랫집이 듣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나는 신랑과 함께 출근을 한다. 신랑을 내려주고 10분 정도 더 부산 외곽으로 내달리면 된다. 헌데 어느날부터 "오늘쪽 옆 가드레일을 받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자주 들었다. 전복대가 보이면 "박아서 죽어버릴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연중 반복되었고 이를 친구, 가족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말하자 적잖히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나는 한번도 이를 실천해 보지는 못했다. 꿈에서도 는 업무의 연속이었다. 낮에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느라 늘 잠을 설쳤고 수면부족과 장애로 인하여 체력이 더욱 고갈되어 갔다. 더욱 참지 못하는 것은 회사가 CEP가 중국 관리자가 유독 나에게만 지나치게 연락을 해대고 업무 지시를 한다는 사실이었다. 늘 책임감 있게 끝까지 업무를 완수하고 회사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모든 행위들이 어느새 족쇄가 되어 버린 것이다.
2024년 1월 1일 CEO가 중국 본사에서 들어온 사장 인사말을 즉시 국문으로 바꾸어 회사 현관에 게시하라는 지시를 했다. 당시 나는 직원들의 급여 정산을 위해 출근한 상태였다. 매년 새해 출근해서 직원 급여를 정산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는 커녕 추가 업무를 지시해 대자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 때부터였을까. 자살충동과 수면장애가 심각해져 더 이상 P사에서 업무를 볼 의지가 약해져만 갔다.
회사는 화물 물류 이동을 위하여 사내 주차구역을 모두 없애 버렸다. 때문에 직원 출퇴근시 주차구역으로 지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정규시간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차에 별다른 애로는 없었다. 헌데 2024년 본사를 이전한 이후부터 단 1개월만에 6장의 주차위반 과태료 고지서를 받았다. CEO와 중국 관리자만이 사내 주차가 가능했으므로 나를 비롯한 많은 직원들이 과태료 고지서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 일당 10만원을 받는 생산직 직원들이 이 고지서를 받았을 때 얼마나 짜증이 날지 눈에 선햇다. 이의 상황을 알렸으나 회사는 주차구역을 직원들에게 반환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법인차량에 똥칠을 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2024년 3월 마지막주 나는 3장 분량의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회사는 사직서라기 보다는 협박이라며 나의 사직서 수령을 거부하였고 면담을 요청하였다. 사직서의 구성은 이러하였다. 근무시간외 업무지시, 근로계약된 사업장 이외의 법인에 대한 업무지시, 불법/부당 업무 지시에 따른 직무 스트레스 심화, 급여 업무 스트레스, 업무로 인한 질병악화(추간판탈출증, 불면증, 우울증), 주차구역 미설치 법규 위반 등. 회사는 돈이 필요하다면 2개월 급여 수준으로 보상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이를 거부하였고 남은 직원을 위해 원천적인 제도 개선을 요구하였다. 갑작스럽겠지만 나는 3월이 끝나기 전 사직처 철회를 하였으며 3개월간의 병가를 신청하였다. 신기하게도 전산 병가 신청서를 CEO가 즉시 승인하여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가 했다. 헌데 이게 왠일인가? 4월초 사측으로부터 휴가신청서 승인 철회 및 사직서 수리 통보를 받았고 4월 중순 퇴사 처리가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즉시 나는 지역고용노동청, 지역노동위원회, 근로복지공단에 회사를 고발하였다. 지역고용노동청에는 갑질피해, 직장내괴롭힘, 고충처리위원회 미설치, 급여 미지급 등에 대한 청원을 하였다. 지역노동위원회에는 부당해고와 손해배상 2건에 대하여 구제신청을 하였다. 근로복지공단에는 불면증, 우울증, 추간판탈출증으로 요양 신청을 완료하였다. 지역고용노동청 담당자는 정년퇴직을 코 앞에 두고 있는 말년 과장이라 업무 진행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전산 & 유선으로 수차례 독촉을 하였으나 지역노동위원회의 결과를 지켜보고 싶다는 말투였다. 우라질, 대한민국 공문원이 다시 한 번 싫어진 계기였다.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 선생님들을 욕할 마음은 없다)
지역노동위원회 1개월 남짓의 기간동안 각 사건별 7회의 이유서와 답변서가 오갔다. 밤세워 가며 지난 5년간의 모든 자료와 출처를 소상히 밝혔고 각종 녹취록 또한 본인을 대변하는 데에 유리하게 활용되었다. 노무사나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있었겠으나 회사측 노무사 자료를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더라. 내가 열심히 만든 리포트에 노무사 도장 따위나 찍고 수수료를 날로 버리기는 싫었다. 내 사건을 누구보다 명명백백하게 서술하고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루 날세워 이유서 1부를 완성해 놓고 보니 무려 4kg가 빠진 것을 보고 스스로도 놀라웠다. 홀로 지역노동위원회 심판회의에 참석하였다. 정식 회의에 앞서 지역노동위원회 위원장이 나를 짜로 집무실로 불러 합의 의지가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회사는 아마 이 위원장에게 합의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회의 내용에 따라 합의 의사가 정해질 것 같다고 짧게 얘기한 뒤 그 자리를 나왔다. 심판을 담당하는 위원들은 어떻게는 쌍방으로부터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에 혈안이 된 것 같았다.
심판장에 들어서니 사측은 CEO, 인사부장, 노무사 이렇게 3명이 출석해 있었다. 뭐가 무서워서 여자 한명 나오는데 남자들 셋이나 우르르 나오나 싶었다. 저러고도 구추 달린 놈들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의아학도 심판위원들은 내게 주요 질문들을 하지 않았다. 이유서의 내용의 맞는지 '예, 아니오' 정도로 답변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솔직히 무섭고 언제라도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기에 고맙기도 하였다. 반대로 사측에는 뼈있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하였다. 노무사에게 법규를 들어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CEO는 위원들의 질의가 유도 질문에 당황해 하는 모습도 보였다. 더불어 심판 중에 "근로자와 합의할 의사가 충분히 있습니다"라고 목 높여 답변하기도 하였다. 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주는 위원들이 모습에 감명을 받은 탓일까? 나도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어서 합의에 동의한다는 말고 함께 심판을 종료했다. 근로자측 위원께서 중간에서 합의금 조율과 조서 작성에 많은 정성을 기울여 주셔서 나도 언젠가 저분과 같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보답없이 헌신하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높아졌다.
다음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일이다. 2024년 4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과를 갔다. 지역근로복지공단에 등록되어 있는 병원을 통해서만 산재 신청이 가능했기에 일부러 집에서 먼곳까지 통원을 다녔다. 정신의학과 의사에게 그간의 진행상황을 상세히 알려 주고 그동안 본인이 정신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을 면담했다. 고용노동청과 지역노동위원회에 회사를 고발한터라 악몽을 자주 꾸었다. 중국 직원들이 도끼나 낫을 들고 나를 죽이려고 달려 오는 것, 갑자기 일면시도 없는 귀신들이 나를 따라 오는 것, CEO가 아직도 꿈에서 나에게 업무 지시 하는 것, 고발 사전에 대한 생각들로 잠에 들 수가 없었던 것 등등. 병원에서는 적응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 나는 이를 근거로 직접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요양을 신청했다. 구제 신청과 마찬가지로 산재 신청 또한 노무사나 변호사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일일히 사건을 설명해대느라 내 시간을 뺏길 뿐이었다.
2024년 6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열린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꼭 참석해서 질병 발생경위와 피해 상황을 직접 참석할 위원들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다행이도 이 자리에는 사측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근로복지공단의 판결에 따르겠다고 동의한 바 있었다. 들어가니 의사, 노무사, 변호사 등 전문가들이 무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공단의 비용이 나가는 것이니 근로자의 질병이 정말로 업무로 인한 것인지 판단에 엄격을 기하고 있음이 1초만에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약 1시간동안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당일 아침 신랑이 약해 보이게 눈물을 많이 보이라고 농담조로 얘기했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연신 울어대며 앞에 놓여진 티슈로 끊임없이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위기가 어둡기도 하였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내가 힘들었던 상황을 말로 풀어내니 그동안의 억울함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목이 메여 질문에 완벽히 답변하지 못한 부분도 있으나 마지막 발언에는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회사의 귀책이 확실하며 앞으로 열심히 치료받고 사회에 나가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결과가 안내되었는데 '적응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 중 적응장애만 인정되었다. 2024년 4월부터 2025년 6월 현재까지 나는 산재요양하며 지내고 있다. 산업안전기사, 사회복지사 1급, 요양보호사, 택시운전기사자격증을 땄고, 정신과 치료를 통해 인지 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2025년 4월 건설회사에 입사하였고 너무나도 즐겁게 직원들과 생활하고 있다. 많은 지인들이 어떻게 이 어려운 것들을 혼자 할 생각을 했냐고 감탄한다. 노무사나 변호사 준비를 해 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나는 단지 내가 겪은 불이익과 불법적인 행위들을 남에게 기대지 않고 직접 풀어나갈 자신이 있었고 전략이 있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이 힘든 3개월 시간이었지만 힘들었던 지난 5년의 시간을 보상받은 기분이랄까. 이번 일을 계기로 회사도 많이 배우고 깨우쳐 남아 있는 직원들이 나와 동일한 사유로 고통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내 인생에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었다. 사측이 개인정보보호위반법 위반으로 나를 신고하여 경찰서로부터 조사 통보를 받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요즘은 아주 즐겁다. 이 일을 계기로 삶을 달리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나를 웃게 해주는 동료들에게 감사하다. 그 월급 몇푼에 울고 웃더 나는 이제 없다. 행복한 그 순간 수간에 감사하고 기뻐하면 그만이야.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