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래희망은

by Jenna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때부터 교사가 되기를 바랐나 부다. 그 이유는 뭐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바란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부친은 시골 출신의 고졸 학력을 가지고 있다. 제조사 생산직을 다니며 전기기사, 소방기사사, 부동산중개사 등 자격증을 따기는 하였으나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진 않았다. 제조사 생산직을 전전하며 2~300만원 수준의 급여를 받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모친도 시골 출신으로 국민학교까지 나왔다. 막내 외삼촌 학비를 대느라 엄마랑 밑에 있는 이모는 모두 국민학교만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부모님은 우리 남매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군이 공무원이다. 그래서 외가쪽 사촌들이 경찰, 공무원, 공기업 입사한 것을 아주 부러워한다.


정확히 몇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였던 것 같다. 부친은 내가 잘못을 하여 벌을 낼 때면 무릎을 꿇고 앉아 옥편 읽기를 시켰다. 이것이 발단이 되었으리라. 우리 집은 방이 3개인 연립주택이었는데 막내 삼촌이 몇 년간 우리집 작은방에서 신세를 졌다. 중국 무역을 하는지 단둥 지역을 오간다고 했다. 그리고 밤에는 자지는 않고 중국어 노래를 틀어 놓아서 우리 가족이 아주 싫어 했더 기억이 있다. 이것 또한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체육에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다. 단/장거리 육상, 줄넘기, 공던지기, 철봉 등 남자 아이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는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가 육상선수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성장통이었는지 무릎과 허리에 큰 통증이 생겨 더 이상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어 이 꿈을 접어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한문 교과가 생겼다. 영어, 수학, 생물, 음악, 체육 등 모든 과목이 좋았지만 그 중 한문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 두꺼운 옥편을 들고 다니며 쉬는 시간 틈틈히 공부를 했다. 한자를 많이 쓰는 중국어가 배우고 싶어 부모님께 계속 학원을 다니게 해 달라고 졸랐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으셨는지 학원비를 지원해 주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중국어 책을 사서 독학을 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 내내 나의 장래희망은 중국어교사/교수였다. 늘 옥편은 멀리하지 않았지만 중국어와 옥편에 들어 있는 한자는 전혀 달랐다. 수능친 후 그 누구와의 상의도 없이 나는 가~다군 모든 학교의 중어중문학과에 지원했다. 짜증나게도 당시 중국붐이 불어 평소 중국에 일도 관심없던 수험생들이 중국 시장이 유망하다며 중문학과를 지원해 댔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예상밖에 높은 경쟁률 때문에 원하는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아쉬운데로 나군 대학교에 합격하여 산소 학번이 되었다.


이미 중국어를 배우고 들어온 동기들이 있어서 위화감이 들었다.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가르쳤단다. 나는 쓰잘데기 없는 불어와 독어를 배웠는데 엄청 부러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산소 학번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세대 아닌가. 매일 선배들과 축구 경기를 보고 시내까지 행군을 펼치느라 학점을 국에 말아먹은 상황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대학교 경험이 없으셔서 학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데 다행이라면 다행. F학점은 면해서 재수강할 과목은 없었다. 월드컵이 끝난 뒤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2학년때 4.5점 만점을 받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물론 3~4학녀 시절에도 장학금을 계속 수혜할 정도로 학습에 매진하였다. 3학년 1학기에는 중국 자매 결연을 맺은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반년동안 베이직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중국 유학 경비를 모았다.


나의 중국어는 별 볼일이 없었다. 교수를 할 만큼 뛰어나지 않았다. 또한 중국붐이 점점 시들어 가고 있었다. 중국 현지에 많은 한국 공장들이 있었지만 현지 채용을 하거나 중국 현지 시물가에 따라 급여를 책정하기에 급여 수준이 아주 열악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돌아온 나는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영어 공부를 하며 서울 및 수도권 대기업 취업에 열을 올렸다. 더이상 중국어교수는 내게 희망적이지 않은 직업이었다. 물론 중국어와 영어 모두 충분히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외영업 직군을 목표로 했다. 서울 대기업 면접을 참석하니 날고 기는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SKY는 물론 외국에서 대학을 나온 경쟁자들이 아주 많았다. 중국 공산당에서 유학한 나는 그들의 축에도 낄 수 없었다. 이러한 자괴감으로 20번 이상 대기업 면접에서 떨어진 나는 부산에 소재한 중견기업으로 눈을 돌려 마케팅팀에 입사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신랑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약 1.5년 근무한 뒤 서울 대기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나는 첫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리고 여의도에 소재한 건설사 행정직 파견사원으로 입사하였다. 정규직은 아니지만 그들의 조직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저녁에 외대 대학원을 다닐 계획이었기 때문에 몸이 가벼운 파견직도 나에게는 만족스러웠다. 건설사 해외사업부 소속이었기에 베트남, 헝가리, 아부다비, 괌 등 다양한 국가에 소재한 지사와 소통하며 해외영업 스킬을 맛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건설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약 2년의 시간을 보낸 나는 하는 수 없이 보다 안정적인 조직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 와중에도 나는 4.44의 최종 학점을 획득하며 장학금 수혜 대상이 되었다.


대학원 졸업 시즌이 다가와서 보다 정규적인 해외영업 업무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지방 잡대가 서울에서 정규직으로 입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눈높이를 조금 낮춰 중견기업 계약직 해외영업 사원으로 입사하였다. 사실 회사에서는 나를 비용이나 처리하는 여직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나 보다. 헌데 대학원 졸업에 영어와 중국어 구사가 가능하니 북미 영엄팀으로 발령내고 계약서도 수정했다. 미국, 캐나다에 변압기를 판매하기 위한 입찰 영업이었는데 너무나도 적성에 맞았다. 난생 처음 10시간이 넘는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 그땐 몰랐는데 말도 안 듣는 이 후해 뭐가 이쁘다고 미팅 장소가 있는 곳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으로 비행기를 예약하여 렌트카로 직접 장거리 운전하면서 로키산맥과 밴프를 보여준 것 같다. 10인승 소형 비행기를 타고 Saskatchewan에 있는 발주처를 방문했을 때는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그 아름답고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 주신 당시 선배님들께 가장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것도 잠시. 6년을 떨어져 지내던 롱디 커플을 종료해야 할 순간이 된 것 같았다. 아쉬운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2014년 말 고향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모님과 못다한 시간도 보내고 신혼집과 살림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냈고 1년 후인 2014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부산에서 일을 구하자니 서그픈 마음이 앞섰다. 연봉이 무려 1천만원이 내려가는 것이었다. 어쩔수 없지 않은가. 이를 받아들이고 산업용 가스탱크 제조사에서 프로젝트관리자로 근무했다. 여기에선 1년간 열심히 직원들과 부어라 마셔라 한 것 같다. 하지만 팀에 나보다 상사들이 많아서 주도권을 가지고 사업을 진행할 권한이 없었다. 극F인 나는 1년간의 근무 후 조선기자재 무역상사로 자리를 옮겼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쉽게도 이직한다며 신기해 한다.


제조사에서 해외영업직을 하며 물건을 떼다 파는 중개상이 되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무역회사로 입사를 결정한 것이다. 10여명 남짓의 직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근무했다. 부울경에 소재한 업체들로부터 소재나 부품을 사서 마진을 붙여 해외로 판매하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조선 경기가 좋지 않아 마진율이 좋지 않았고, 경기가 악회되자 사장은 여직원 3명을 권고사직하는 상황도 지켜보았다. 다만, 평소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업무 방식에 적합했던 나는 회사에 많은 신규 고객들을 발굴해 주었다. 물론 그에 따른 성과급을 위해 열심히 한 건 비밀이다. 사실 전국에 이 곳과 비슷한 무역회사들이 천지다. 서로의 고객을 뺏어 오고 마진을 깍아 내리는 제살 깍아 먹기식 사업 운영이었다. 직원들이 언제 어떻게 회사의 정보를 가지고 도망갈지 노심초사하였다. 주말에도 누군가가 출근하면 사장에게 알람이 가고 사장은 직원들을 CCTV로 지켜보았다. 이를 알게 된 나는 회사에 미련없이 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쯤되면 이직이 잦아 조금 부끄럽다. 사실 위에는 1~2개월 다니던 회사들은 포함하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중국투자제조업체의 인사/총무 책임자로 채용되었다. 중국어 본사를 두고 있고 발주처 100%가 미국이었던데 중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점이 큰 이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설립된지 1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신생업체였기에 내 회사처럼 살뜰이 챙기며 운영했다. 하지만 회사의 갑질과 직장내괴롭힘, 직무스트레스, 업무상질병 등의 이유로 퇴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직했던 6년 가까운 시간동안 인사/노무/총무의 전문가가 되었다. 평소 행정/보고/기획 능력이 뛰어나 CEO는 회사의 중대한 업무를 모두 내 손을 통하게 하였다. 산재가 인정되어 1년간 휴양하였는데 휴양 기간동안 택시운전자격,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땄다. 다독하며 그 동안의 심적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나를 달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제조사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고 다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약 5년간 프리랜서 통역가로도 활동했다. 기업체 방문, 공항 의전, 수출상담회, 산업시찰 등 이 모든 활동들을 수익이 아니라 재미로 다녀왔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제안이 들어오고 있는데 아쉽게도 당분간은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얼마전 건설회사 Inhouse 통번역사로 채용되었기 때문이다. 외국계 데이터센터 건설 현장에서 발주처와 시공사 사이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있다. 지난 회사에서 발생한 우울중과 불안증세가 이 곳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급여를 받을 것이 아니라 동료들에게 웃음 값을 치러야 할 정도로 하루 하루 나날들이 즐겁고 행복하다. 2년 계약직이지만 추가 입찰에 따라 계약 기간 연장 가능성이 있어 희망을 걸고 있다.


내 나이 올해 43살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급여가 최우선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갈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함께 있어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사람들과 남은 인생을 채워 가고 싶다. 물론 나 또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딸 때에는 50대에는 고령으로 힘들어 하시는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력이 없어서인지 면접의 기회를 만들기 어려웠다. 아마 2030년대에는 복지 계열에서 근무를 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나는 아직도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임을 잊지 말고 자신있게 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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