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복하지 못한 가정 환경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죽어도 결혼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해 왔다. 멀쩡한 직자옫 있겠다 이런 식으로 열심히 저축하며 알뜰히 지낸다면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은 문제 없겠다고 여겼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절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툼을 이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친의 일방적인 언어 폭력이었다. 뭐가 맘에 그렇게 들지 않는지 회사를 마치고 들어오면 늘 가족들에게 짜증을 부려댔다. 생산 현장에서 말단 직원으로 근무를 해서 그런지 늘 불만을 달고 살았다. 집에 들어와서도 초등학생 자녀들이 듣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고 그냥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가족들을 달달 볶아댔다.
집안에서 늘 침을 뱉어댔고 항상 방 안에는 막걸리나 소주병이 굴러 다녔다. 아침 출근함에도 불구하고 새벽 3-4시까지 술을 마셔대로 출근을 했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남편이 뭐가 좋다고 모친은 늘 맛난 안주를 만들어 바쳤다. 그러다가 밥 안에서 돌이 나오거나 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오면 밥상을 뒤엎어 천정까지 뻘건 국물이 번진 적도 종종 있었다. 나는 항상 이런 모친이 불쌍했다. 우리는 괜찮으니까 이 집을 떠나 행복하게 살길 바랬다. 남편이 주는 월급을 아껴가며 우리 남매를 키웠다.
지인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우리 남매한테 가정에서 체벌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미취학 시절부터 항상 회초리와 효자손, 빗자루, 몽둥이 등으로 자주 맞았다. 남매가 싸우기라도 하면 무조건 엎드려 뻗쳐서 엉덩이 매질을 당했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손바닥을 효자손으로 맞았다. 한순간 부모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회초리로 온 몸을 구분하지 않고 맞았다. 맞다가 대문 바깥으로 도망나간 적도 있다. 그래서 우리 남매는 부모에게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동생은 일찍이 학업과는 이별을 했고 중학교때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놀았다. 고등학교때에는 게임으로 사기를 쳐 모친이 경찰서에 드나들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나 또한 많은 방황을 하였다.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서 주변 불량 친구들과 몰래 술과 담배를 사서 어두운 공터에 모여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냈다. 부모들은 야간 근무를 하느라 내가 그렇게 다니는지 몰랐을게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게 옳겠다. 매일 그렇게 시간을 보냈고 학교 생황을 엉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매일 욕을 해대는 부친과 이에 아무런 방황을 하지 못하는 모친이 꼴보기 싫어 바깥을 맴돌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우리 가정은 파탄의 길을 달려 가고 있었다. 이런 어린 시절 영향때문에 나는 남자라는 짐승들을 믿고 함께 살 수 없었으며 단순히 Enjoy 상대로만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의 한 중견 제조업체에 사무직으로 입사했다. 부산에서는 드물게 30여명 신입 공채에 합격하여 동기들이 생겼다. 마케팅과 해외영업을 담당하는 나는 영업팀 신입들과 가깝게 지냈다. 동기 모임을 하더라도 이들과 잔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어느 날 새벽 늘 조용히 앉아 말 한마디 안하던 생산관리팀 동기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평소 전혀 왕래가 없었고 대화가 없었기에 단순한 안부 문자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하지만 이런 연락이 반복되는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내게 호감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우리 둘은 한 여름날 영화를 같이 보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enjoy 상대로 그를 만날 뿐이었다. 여전히 부친이 내게 심어준 남성에 대한 부정정 이미지가 강력하게 박혀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나와 전혀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모든 부분을 내 부친과 비교하게 되었다. 욕을 하는지, 주사가 있는지, 약자에게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지, 말은 많은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는지 등등. 그는 욕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술은 스스로 찾아 마시지 않으며 담배는 한 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도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먼저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가 없었으며 말수도 아주 적었다. 그의 모친은 사랑으로 남매를 보살폈으며 부친은 화물 운전기사였지만 거칠지 않은 책임감이 강하고 절약정신이 투철했다. 우리가 만난지 6개월째가 되었을 때 나는 서울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4년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우리는 두달에 한번씩 데이트를 하며 관계를 이어왔는데, 이 친구는 한번도 내게 불평을 하거나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친구의 오랜 기다림과 깊은 심성을 믿고 독신의 신념을 뭉개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렇게 우리는 20대에 만나 30대 중반에 결혼헀다.
나는 결혼을 하더라도 우리 남매같이 불쌍한 자녀들로 키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자녀를 갖지 않을 생각을 했다. 사실 내 경력을 버리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경단녀 대열에 들어서고 싶지 않기도 하였다. 직접적인 표현은 안하셨지만 양가 부모님들을 결혼과 동시에 손자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랑을 한번도 내게 자녀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결혼 5년이 지나자 그도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2세를 원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노력에도 소식이 없자 난임센터를 방문했다. 놀랍게도 무정자증 진단을 받게 되었고 나는 오히려 잘됐다며 우리 둘이서 부담없이 신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결혼 11년차가 지금에도 이 사실을 모르는 지인과 친지들은 만날 때마나 자녀 소식을 물어보며 우리 부모님들과 신랑의 마음을 후벼파고 있다.
사실 나는 지금 현재 신랑과 너무나도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이와 같은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나와 신랑은 모두 회사를 다니며 매월 1천만원 이상의 월급을 받고 있다. 매월 400만원이상 꾸준히 저축을 하고 있으며 주식, 펀드, 연금, 외화 등에 분산하여 투자하고 있다. 26평 구축 아파트를 사서 임대를 주고 있으며 20년 안에는 재건축에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생활비는 200여만원 정도 사용하는 것 같다. 눈치보지 않고 먹고 사고 입고 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좋아한다. 매번 주말이면 항상 교외로 트레킹을 간다. 부산에 사는지라 경기도, 강원도 기역 여행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코로나 시절 외국 여행이 어려웠을 때 강원도와 경기도를 싹 둘러보고 내려왔다. 매년 여름 휴가 시즌에는 신랑 회사 휴가기간에 맞추어 해외로 떠난다. 우리는 함께 터키, 홍콩, 마카오오, 대만, 중국, 태국, 일본 등지를 가보았다. 앞으로 신랑을 위해 더 많은 멋진 곳으로 안내자가 될 계획이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곳들을 하나하나 적어보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 같다.
묵묵히 나를 지켜봐주고 지지해 주며 한없는 신뢰를 주는 사람, 사랑합니다. 당신이 먼저 이 세상 떠나면 내가 그 다음날 따라갈게. 당신은 내가 먼저 떠나면 이쁜 할머니랑 재미 좀 더 보다가 따라오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