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하여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때가 되었다. 성장과정, 학창생활, 지원동기, 성격 장단점, 입사후포부, 성취경험, 실패경험,,,, 20년 전엔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와 같은 항목으로 신규직원들을 채용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별다른 경험없이 자란터라 이들 항목에 500자를 그럴 듯하게 채우는 것이 옥녹록지 않았다. 가수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 중간에 "나들이 다하는 외식 한 번 한적이 없었지" 이 대목은 나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주야 근무를 하며 월급을 꼬박꼬박 벌어오시는데 늘 저축에만 신경쓸 뿐 우리 남매들을 위해 투자하기는 아까웠나 보다. 5만원짜리 학원도 눈치를 보며 다니다가 결국엔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만 두기도 하였다. 친구들이 용돈기입장에 사용한 기록을 정리하는 것도 무척이나 부러웠다. 나와 동생은 필요할 때 1~2천원. 1~2만원 받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외식이나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주말에는 부모님은 그냥 집에서 TV를 보거나 주무시거나 하는 게 다였다. 우리 남매는 당연히 갑갑한 집안 분위기가 싫어 동생은 학교 친구들과 밖에서 수다나 떨며 놀았고 나는 학교 열람실에서 자습을 하는 등 시간을 때우고 밥때나 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모친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그래서 남들이 외식하는 대부분의 음식을 집에서 먹을 수 있었긴 했다. 후라이드치킨, 안동찜닭, 돈까스, 백숙, 아구찜, 분식 등등 거의 못하는 요리가 없다고 생각하도 무방할 정도였다. 부친도 어느 식당보다 모친의 음식이 가장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로 기분이 나빠지면 밥상을 엎는 일도 잦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밖에서 남에게 돈 주고 먹는 밥보다 모친의 노동으로 먹는 음식이 더 저렴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었다. 부친은 운전면허가 있었지만 온 동네에 울려 퍼지도록 시끄러운 고물 오토바이를 몰거나 길에서 남들이 쓰다 버린 자전거를 손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4가족은 부산 시내는 물론 어딘가로 떠나 본 적이 없다. 부친은 눈이 좋지 않아서 차를 몰 수가 없다고 했다. 어릴 나이에는 그 말을 믿고 안쓰러워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부친이 자가용을 사치라고 생각했고 가족들의 편안함과 추억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사람이었음을 안다. '개처럼 벌어서 짐승같이 쓴다'는 속담이 부친과는 아주 관련이 없어 보인다. 모친은 이런 부친 눈치를 보느라 우리 남매에게 풍족하게 투자해 주지 못해 미안해 하였다. 나는 그런 부모가 짜증나고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짠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열심히 벌어온 돈은 우리 4가족 그 누구도 기쁘게 하지 못했다. 각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통장들만 행복해 했을 뿐.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해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워라밸을 맘껏 즐기고자 했다. 흥청망청 낭비가 아니라 내가 열심히 경제적 활동을 한 만큼 나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하며 내 인생에 대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부모에게 보여주고 복수하고 싶었다. 자신들의 인생이 얼마나 실패작이었는지. 안타깝게도 우리 부모는 나와 남동생으로부터 존경 따위를 받지를 못한다. 반대로 멸시와 무시만을 받을 뿐.
내 꿈을 이루고 부모같이 살고 싶지 않아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 했다. 매일 7시전 아무도 없는 학교에 등교해서 공부하고 야간 자율학습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주말에도 학교 도서관을 떠나는 날이 없었다. 대학교에서도 매일 8시전 도서관에 도착하여 12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수업이 없는 모든 시간은 도서관에서 자격증과 취업 준비를 했다. 입사해서도 마찬가지로 6시 반 전후 출근해서 그날 일을 시작했다. 당연히 학교에서의 성적과 회사에서의 근무 평가는 우수했다. 나를 채용하는 회사는 가성비가 아주 좋은 직원을 채용했으니 아주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내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는 주말, 휴일, 야간 시간을 불문하고 언제나 업무에 올인되어 있었다.
이력서를 제출하거나 면접에 임할 때면 '완벽주의자'라는 장점을 적극 피력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정신과 인지치료 중 이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완벽주의자'라고 적혀 있는 내 이력서는 인사담당자들에게 아주 부담스러웠으리라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을 뿐더러 종종 실수를 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사람에게 더 호감이 간다는 것을 인생 40년을 살고야 깨닫게 되었다. 정신과 전문의는 내가 가족과 가정환경으로부터 잘못한 성격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학교생활, 직장생활, 개인생활 모든 영역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 중 부친의 존재가 그 문제의 중심에 있음을 알려 주었다. 가슴이 아팠다. 내 인생을 한 사람이 망쳐 놓은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고자 노력했는데 이것이 부친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처절한 발악이었음을 알고 난 후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이 몰려 왔다. 1년간의 약물치료를 통해 그 증상이 완화되어 가고 있다.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좀 더 유연하게 변화시켜야 할 것 같았다. 미친듯이 몰두해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 휴식기를 가지며 제2의 인생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다. 사회복지사1급과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노인요양원과 지역아동센터, 종합사회복지관에서 봉사를 했다. 봉사를 하며 이전에 느끼지 못한 무언가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따뜻하게 차오르는 그러한 느낌이었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을 보며 그동안 내게 추구했을지 모를 돈과 명예, 사회적 지위 등이 한없이 보잘 없게 보였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시는 분들은 우리 봉사자를 바라보며 젊음과 건강을 부러워했다. 불혹을 빌미로 다시 태어나 보려고 한다.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스스로 기쁨, 행복, 만족을 찾으려고 삶의 태도를 바꾸었다. 나에게 슬픔과 고통만을 주는 부모를 받아 들이고 그들의 남은 인생에도 기쁨, 행복, 만족을 선사하고자 한다.
나와 똥띠의 여행에 그들을 동반하고, 맛집 탐방에 그들을 초대했다. 은행에 맡겨두고 도무지 인출을 하려 들지 않는 부모를 위해 내 은행 구좌의 잔액을 줄여 가기로 했다. 평생 승용차를 타보지 못한 그들을 위해 중형 차량을 구입했고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드라이브를 시켜 준다. 우리 집에는 월 1회의 제사가 있다. 거기에 설과 추석 명절을 합치면 총 14번의 제사를 치른다. 승용차가 없다는 핑계로 부친은 한번도 설과 추석 대명절에 자신의 장인과 장모를 뵈러 가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론 한번도 외가댁을 방문해 본 적이 없다. 모친은 항상 이런 자신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겼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와 32살이 되던 해 중고차 한대를 구입했다. 이 때부터 매년 수차례 모친을 데리고 외가댁을 방문한다. 이 자리엔 부친도 있다. 외가댁을 자주 방문하지 못했던터라 외가댁에서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이제는 내가 외조부님께 용돈을 드린다. 자손들 중 제일 자주 얼굴을 뵈러 오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외가댁 내 모친의 지위가 조금을 상승되었으리라. 모친의 그 동안의 한과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졌으리라.
좀 더 덜 치열하고 빡시게, 대신 좀 더 여유롭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