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장기

by Jenna


트럼프 정부가 별도의 취업 비자 없이 전자여행허가(ESTA)로 출장길에 오른 국내 기업인들의 미국 입국을 줄줄이 막고 있다는 소식이다. ESTA는 미국 정부가 무비자로 90일 동안 외국인을 머무를 수 있게 한 제도이다. 나도 미국 출장을 갈 때마다 전산으로 ESTA를 신청하고 일부 수수료를 낸 뒤 방문 자격을 쉽게 획득해서 입국했다. 어제는 이란을 떠나라고 난리더니....

내 영어는 비록 유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영어권 국가 유학이나 여행 없이 오직 홀로 독학하여 습득한 결과물이다. 타 언어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게도 미국과 캐나다 지역 영업을 하며 회사 돈으로 몇 차례 이들 국가에 출장을 가보았다. 이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끄적여 보려고 한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출입국 직원들의 인터뷰에는 주눅들지 않았지만 신발까지 벗어들고 만세를 하며 전신을 투시당하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마치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랄까. 샌프란시스코의 한 조선소에 통역원으로 투입되었다. 평소 안전 의식이 투철하지 못했던 나는 조선소 문을 통과하자마다 안전감시단에게 붙잡혀 갔다. 내가 한국에서 들고온 작업복, 안전모, 안전화, 보안경 모두 그들의 지적 대상이 되었다. 나는 그들에 의해 현장 바깥으로 쫓겨 났으며 출입금지 대상 및 업체가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업체는 아니었지만 회사 얼굴에 먹칠을 했으니 마음이 찝찝했다.

나는 곧장 인근 마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의 기준에 맞는 안전용품들을 찾아내 착용했다. 평소 44반의 내 체격에 77 사이즈의 용품들을 걸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런 꼴이 자기네들 기준에 들어 맞는지 다음날 나는 문제없이 조선소 문을 다시 통과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우리 회사가 공급한 조선소 연료 탱크 시운전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출장자였다. 한번도 조선소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의 안전수칙에 익숙히 않은게 당연했다. 선박에 설치되어 있는 우리 제품에 접근하기 위해 야드를 걷고 있는데 또 다시 안전감시단이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호각을 불어댔다. 운행 중인 크레인 밑으로 이동이 금지되어 있는데 내가 이를 위반한한 것이다. 나와 우리 회사는 또 다시 벌점을 먹엇다. 이러다간 통역 한 마디 하기도 전에 한국으로 쫓겨날 판이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뿔사. 여긴 우리가 생각하는 구내식당이나 함바가 없었다. 직군을 불문하고 모두 도시락을 싸 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른채 내 몸 하나 달랑 챙겨 조선소 야드에 들어온 것이다. 조선소 바깥에 몇몇 식당이 있기는 했지만 77 사이즈 복장으로 제한된 시간 안에 야드를 왕복할 자신이 없어 첫 날을 그렇게 배를 쫄쫄 곪아가며 보냈다. 다행이 한인 숙소에서는 매일 저녁 사장 부부께서 한국에서 파견나온 엔지니어들을 위해 맛있는 한식을 준비해 주었다. 나는 엔지니어는 아니었지만 단 한 명의 여성으로서 한숨에 다른 한국인들의 집중을 받았다. 우리는 매일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고 풀장에서 더위를 식히며 1달간의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집 앞을 산책하다 그 분들 중 몇 분을 만나 반가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세상 참 좁다. 그렇지 않니한가.

한국에서는 그새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미국 출장이 처음이었던 나는 조선소측 담당자와 종종 회상서 지급받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했는데 요금이 100만원이 넘게 나온 모양이었다. 팀장이 나 대신 소명하느라 진땀을 뺏다는 후문이 들렸다. 이후에도 나는 수리조선소에서 몇 개월 동안 통역을 한 경험이 있다. 화물선박 기관실에서 호스에 걸려 넘어져 죽을 뻔한 적도, 러시아 게잡이 선박의 선원으로부터 대게를 선물받은 적도,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 어창에 들어간 적도 있다. 옆에서 용접하던 기술자가 감전사 당하는 모습을 보고난 후에서야 조선소를 더 이상 더나들지 않게 되었다. 이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다시 한 번 그 큰 선박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다보고 싶기도 하다. 요즘 들어 무릎이 시큰거리는데 더 늦기 전에 누가 좀 불러줬음....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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