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0년대생이다. 나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정신병원이라고 하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마치 미친 사람들만이 가는 곳으로만 생각했다. 볼혹에 접어 들보고니 마음에 병 하나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어디 있을까 싶다. 나는 지난해부터 1년간 우울증과 불면장애로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고 있다. 회사에서 번아웃과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지인들로부터 적극적으로 정신과 진료를 권고받았다. 그들도, 그들의 가까운 가족들도 진료받고 호전되고 있다고 말이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홀로 병원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우리 집 인근에도 심리 상담소가 꽤나 있다. 하지만 임상심리사나 심리학을 전공한 수익을 목적으로 우후죽순 생긴 전혀 신뢰감이 가지 않는 그런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나는 근로복지공단 주무관의 도움을 받아 전문의가 상주하는 종합병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정신의학과 앞에 도착했을 때 많은 대기환자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많단 말이가. 부모와 함께 온 중고딩들, 두 손 맞잡고 있는 부부, 고성을 지르는 부인을 제지하고 있는 남편, 70대 할머니, 휠체어로 이송된 80대 치매 남성 등등. 한편으론 정신과 치료를 감기처럼 평범한 질환으로 받아 들일 수 있어서 마음 한 켠이 편안했다. 의사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속으로 수십번 되뇌였고 이에 모자라 핸드폰 노트앱에 1번 항목부터 10번 항목까지 조리있게 써 내려 갔다.
내 이름이 불리었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내 또래로 보이는 의사의 모습에 그 전문성과 임상 경험에 의구심이 생겼지만 이내 참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의 문제 상황과 마음 속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초진 분위기를 유도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노트를 보며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사실 나는 내 속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꺼내 놓지 않는다. 그게 부모, 신랑, 친구라도 말이다. 그렇게 40년간의 응어리가 내 마음속에 켜켜히 쌓여 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내 속 얘기를 털어 놓는다는 것이 부끄럽고 어딘가 불편했다. 하지만 매번 병원을 찾아 어떠한 연결 고리도 없는 의사에게 그동안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얘기들을 꺼내 놓으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매체에서도 많이 권유하지만 나의 주치의도 명상도 운동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내 머리는 항상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스스로를 긴장에 빠져 들게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경쟁 구도에 놓인 경우 승리를 위하여 각종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이에 대한 액션 플랜을 여러 개 만들고 승리를 거머쥘 때까지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주치의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생각 멈추기, 나쁜 생각 흘려보내기 연습을 시켰다. 매일 잠자리에서 이불킥 하느라 불면에 시달렸는데 여러 가지 인지 치료와 상담, 그리고 약물 치료를 통해 증상이 다소 완화되었다.
주치의는 불안, 적응, 우울 장애와 더불어 강박장애를 내 주요 증상으로 꼬집었다. 강박성 성격장애는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며 과도한 성취지향성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정신질환이라고 한다. 겉보기에 성실한 모범생으로 보이나,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정리정돈과 자신만의 규칙 등 세부적 사항에 얽매여 오히려 비효율적인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려 과하게 애쓰는 동시에 지나치게 가족, 친구들에 헌신하는 탓에 사회적 관계가 불안정하며 자신감, 자존감이 아주 낮은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바로 내 모습을 그대로 설명하는 듯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애는 가정환경, 성상과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했다. 나는 사실 내 정신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내 가족들과 최대한 원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의 영향권으부터 멀어지고자 늘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지난 회사 선배를 만났다. 4살 터울의 오빠가 많이 아파서 병수발을 하느라 꽤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부산에서 가장 좋은 국립대를 졸업했지만 졸업 이후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해 지천명이 된 지금까지 내 선배에게 전적으로 생활을 의지하고 있다. 몇 개월전 자신의 오빠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응급실로 가자고 졸라댔다고 한다. 오빠의 고관절과 다리가 앞뒤로 주체할 수 없이 흔들거렸고 그 때마다 큰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다급함에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아 갔지만 의료 파업 때문에 의료진이 없거나 병상이 부족하다고 거절하기 일쑤였다. 하는 수 없이 동네 의원과 병원을 찾아 각종 검사를 받았지만 지극히 정상이라며 어느 곳도 명확히 진단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며칠이 흘렀다.
오빠는 여전히 고통에 밤낮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가정의학과, 신경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등등 병원을 계속하여 전전했지만 여전히 시원한 답변을 주는 곳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류마티스내과를 방문했을 때 의사는 한 번에 정신과로 진단했다. 오빠는 물론 가족들 모두 정신과로 가라는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고 돌팔이 의사라며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또 다시 오빠는 고통에 신음을 해대며 응급실행을 요청했다. 그 날은 일요일. 진료를 하는 곳은 SY병원 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그 쪽 응급실에서는 오빠를 받아주었고 미친듯이 돌아가는 오빠의 고관절과 다리를 보고는 앞서 도착한 다른 환자들이 한사코 길을 양보해 주었다.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생각으로 가족들은 정신의학과 의사를 만나 보기로 했다.
의사는 오빠를 보자마자 지체없이 약 처방을 내리고 이틀에 한 번 방문할 것을 요청했다. 하루 이틀은 약에 반응이 없었다. 이에 의사는 보다 강력한 약을 처방했다. 놀랍게도 이때부터 오빠의 통증과 고관절의 흔들림이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약의 효과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오빠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오빠는 아직도 본인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있지 않지만 약의 효과에 할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식 의사와 상담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25살 이후 평생 집 안에 갇혀 사회와 단절하고 살아왔던 오빠의 마음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가족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조금 더 빨리 오빠의 마음을 알아 차렸다면,,,,, 25살 그 때 마음을 좀 잘 돌봤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그도 여느누구처럼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나와 선배의 오빠는 병원 동기였다. 내가 격주마다 내원하는 병원에서 같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이 더 다치기 전에 먼저 알아차려 주자. 매번 가는 정신의학과 대기 환자 수가 줄어 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