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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Jun 16. 2023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사회인 내 점수 100점.


결혼 전 / 결혼 후


6년전 결혼을 했다. 스물 여덟에 결혼을 하자마자 임신을 했고 스물 아홉, 요새는 첫 출산을 하기에는 스물 아홉이 다소 어린 나이라는데 나 역시 내가 아직 덜 큰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얼결에 아이 엄마가 되었다. 이십대 후반에 갑자기 역할이 많이 생겼다. 결혼을 하니 아내와 며느리라는 역할이 생겼고 아이를 낳고 나니 엄마가 되었다. 


그 역할들을 해내는 것에 있어 우여곡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게다가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혼자 무리를 하면서 발을 동동거리다가 괜히 남편과 다투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남편과는 아이가 두세살일 때 사이가 굉장히 안좋았는데 이유는 사실 나의 초조함 때문이었다.


엄마로써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딸로도 며느리로도 아내로도 잘하고 싶고, 내 일도 해서 돈도 벌고 싶었다. 특히 몇 년 전 집값이 폭등했을 때,  진작 내 집 마련 했던 남들은 경제적으로 다 앞서 가는 것 같은데 남편 외벌이로는 내 집 마련도 너무 멀어보였다.  


그래서 종종 프리랜서 일을 해서 용돈벌이도 했는데 집에서 주로 일을 하다보면 하루종일 일과 육아만 반복된 일상이었다. 아이랑 부대끼고 키보드 두드리는 것만 반복하다보면 너무 답답해서 하루종일 숨통이 막혀 있었다. 그러다 남편이 퇴근하면 피곤한 사람을 붙잡고 괜히 신경질을 내곤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회사에서 힘들어서 왔는데 집에 와서 한탄 하는 소리만 듣고 있으려니 짜증도 났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 싸워댔다. 내가 주로 하는 말은 너는 사회적으로 역할도 잃지 않고, 돈을 번다는 보람도 있고, 변한 것이 없지 않냐고 빈정대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럼 바로 반박했다. 내가 육아를 아예 돕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주말 평일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데 너는 대체 무엇이 불만인 것이냐! 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남편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남편이 반박을 하면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남편이 '나도 내 역할 한다' 이 말이 그 때는 '너의 희생은 별 것 아니다' 라며 내 역할을 무시하는 식으로 들렸다. 그럴 정도였으니 내가 그 때 얼마나 심사가 꼬였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남편도 답답했겠다 싶다.


어느날도 남편과 대판 싸우다가 울컥 터져나오는 감정에 속내를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잘하고 싶은데 하나도 잘 해내는 것이 없어서 너무 괴로워." 


매일 네가 못했고 나는 잘했고 그런 소모적인 얘기만 하다가 진심이 담긴 말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남편도 그 말을 듣고 내가 조금은 안되어 보였는지 싸우던 것을 멈추고 날 안아주고 위로해줬다. 


"너무 전부다 잘 하려고 하지 마. 보통이나... 보통보다 조금 못해도 괜찮은거야."


조금 웃음이 났다. 보통도 아니고 보통보다 못해도 괜찮다라. 그래도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어 그 때 부터 나의 목표는 50점이 되었다. 엄마로도 50점, 딸로도 며느리로도 아내로도 50점이라도 해내자. 사실 어느 때에는 그 점수도 굉장히 벅차게 느껴졌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어엿하게 유치원을 다니게 되고 남편과 나는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이십대 중반에 만나 삼십대 중반이 되니 10년간 우리는 무얼 했는가 하고 한탄하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 한 것은 많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고 어찌어찌 키워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발전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면 돈이 더 빠르게 모인다는데 우리에게는 해당 없는 얘기인 듯 했다. 세 사람 먹고 살기가 매달 빠듯해서야 언제 노후 준비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오픈한 카페


그래서 올해 초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사업 아이템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4월이 내가 프리랜서 일이 끝나는 달이었어서 시기적으로 좋았다. 부동산에 발품을 팔아가면서 적당한 건물 자리를 알아내고 구상만 하던 사업을 실사화 하기 시작했다. 


때로 굉장히 버거운 적도 많았다. 내 생각같이 일이 돌아가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하고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바로 '더 좋은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사회인' 이라는 목표였다. 지금까지는 50점이었지만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면 70점,80점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그리고 5월 말이 되어 본격적으로 영업장이 오픈을 했다. 아이돌 파티라는 컨셉을 가지고 운영하는 카페 매장인데 첫날부터 꽤나 성공적으로 매출을 올렸다. 5월 내내 바빴고 6월에도 정신이 없었다. 주변에 연락 올 때마다 전화에 대고 하는 첫 말은 "내가 너무 바빠서 연락할 틈도 없었네" 였다. 그러면 주변에서는 말한다. "바쁘다니 장사가 잘되나보네. 바빠야 좋지" 나도 그 말에 동의는 한다. 


아직 잘된다 라고 말하기엔 시기상조지만 내가 구상했던 사업의 방향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느날들은 손님이 많아서 정해진 시간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야근? 아닌 야근도 많이 했다.




그렇게 바쁘니 좋긴 한데.....





어느날 일이 끝나고 터덜터덜 집에 왔는데 자고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아이랑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낸게 어언 한달도 더 전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 아침 아이랑 얘기할 시간이 있었는데 아이가 떼도 많이 쓰고 나에게 전보다 더 붙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쿵 하는 느낌이었다. 아직 여섯살.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할 나이다. 늘 엄마랑 붙어 지내다 유치원 등하원도 아빠가 시켜주고 주말 내내 엄마가 보이지 않으니 아이가 불안했던 모양이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남편이 아이 옷 입혀 놓은 것도 코디가 이상했다. 코디 따질 형편도 아니지만 한눈에도 엄마가 입히지 않았다는 게 티가 났달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더 나아지자고 하는 일인데 엄마 점수는 더 형편이 없어졌다.


얼마 후에는 남편이 가족 모임 있어서 갔다 왔었다고 스치듯 말했다. 아차차 시댁 행사는 아예 잊고 있었다. 그 뿐인가 친정은 더 뒷전이다. 남편은 아예 논외 말할 것도 없다. 그냥 내 일만 동동거리고 있다. 평소에 살뜰히 챙기던 편도 아니지만 더 형편이 없어졌다. 


생각해보니 50점은 커녕 이젠 20점도 안되는 점수다. 20점도 후한 점수다. 그렇다고 사회인으로써 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가. 아직 그것도 미지수다. 이제 그것도 꼬물꼬물 20점 될랑말랑이다. 그래서 내 점수는 100점이다. 엄마도 20점, 아내도 20점, 딸 며느리 20점, 사회인으로써의 나도 20점. 합쳐서 100점.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더 나은 내가 되겠다고 벌인 일인데 어쩐지 내가 열심히 할 수록 내 점수는 갈수록 깎이는 느낌이다. 언젠가 남편이 50점만 되어도, 그보다 미치지 못해도 괜찮다고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러면서 이제는 다시 되뇌인다.


'그래 합쳐서 100점이라도 되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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