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도 수용하기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왔다. 늘 룸메이트가 있다가 혼자 지내게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응이 되지 않은 것 같다. 퇴근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저녁을 먹고, 2시간 반 동안 드라마를 보았지만, 집 안에 홀로 있기가 힘들어서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밖에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역시 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구나. 모르는 사람이라도 보이는 게 낫네.' 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연애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내 삶도 누군가를 만날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당장 기회가 생길 수도 없다. 얼마 후 있을 영어 시험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를 하지 않고,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서 좀 속상하기도 했다.
천천히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걷다가 거의 마지막 시점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 외로운 감정은 잠깐 지나가는 거야. 편안함을 위해 감수하는 거야.'
'이게 나야.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나고, 때로는 더러운 상태로 지내는 것도 나야. 열심히 사는 모습도 나고, 때로 드라마에 중독된 것처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야. 일을 잘 해냈을 때도 나고, 그렇지 못했을 때도 나야. 코를 파고, 귀를 파는 것도 나고, 방귀를 뀌는 것도 나야. 화장을 해서 꾸민 모습도 나고, 꽤재재한 모습도 나야. 성적인 욕구를 가진 모습도 나야. 창피해서 숨어 버렸을 때도 나야. 뚱뚱했을 때도 나고, 날씬해진 것도 나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과거의 모습도 모두 나야.'
내가 내 모습 중에서 싫어서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부인하는 모습은 그림자가 되어 오히려 더 안 좋게 영향을 끼치고, 언젠가는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었다. 나 또한 내가 잘하는 모습, 멋진 모습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어렸을 때부터 애써왔다. 그런데 올해는 어쩌다보니,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에서 나의 연약함이 많이 드러나게 되었다. 좀 숨겨 보려고 애썼는데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아서 친한 사람들에게는 솔직하게 많이 이야기했었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던, 나만 아는 나의 모습과 과거,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도 나라는 것을 오늘 산책을 하며 인정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에니어그램 딥 리빙' 309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연민을 가지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인생을 대면하고, 지금 일어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내면의 경험들에 대해 특별한 반응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생에는 분명히 엄청난 일이 생긴다. 뜻밖에 내면의 긴장이 풀어지고 새로운 내면의 성향들이 기적처럼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성향은 자연스럽게 내면에 자리하고 자신의 실체로 느껴진다. 이는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과 연결되어 당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며, 훨씬 더 많은 대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나 자신에게 회초리를 갖다 대며, 더 열심히 살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탁월하게 살도록 요구했었다. 그러다보니 내 감정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았고, 나의 연약한 부분을 인정하지도 않고 드러내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그런 부분이 드러나면 수치심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그런데 오늘 산책을 하며 '너의 좋은 면 뿐만 아니라 좋아보이지 않는 면도 다 너야. 그래도 괜찮아.'라고 인정을 해주니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외로운 것도 나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드라마만 본 것도 나지만, 내일은 다른 삶을 선택할 거니까. 그리고 이제 나를 그만 가리고 싶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게 훨씬 더 당당하고 멋지고 자유로운 삶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