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두 번째 방문하던 날, 평범해 보였던 평일 아침 9시, 서른 명의 환자들에게서 나는 감사하게도 '삶에의 의지'를 한 줌 발견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온전히 삶을 나아가고 싶었다. 약의 힘을 빌려 내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더라도, 당분간 생길 공허한 기분을 감내하더라도, 그 공터에 온전한 나를 새로 쌓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을 복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지만, 적어도 현 상황을 수용하는 시작점임을 받아들였다. 의사의 말대로, 설문지의 분석 그대로, 내 과거를 지금과 분리해 내는 그 시작점.
내가 정신과를 찾아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게 된 계기는, 회사원이라면 너무나,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재직 중인 회사는 기업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던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회사의 서비스를 여러 기업에 세일즈 하는, 이른바 B2B 사업개발을 도맡아 해왔다. 갑과 을이 명확하게 구분된 상황에서 (물론 나는 을이었다.), 나는 사고를 쳤다. 나의 섬세하지 못한 소통으로 인해 여러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일은 벌어진 것이고, 기업이 희망하는 조건에 맞춰서 해내야만 하는 것이기에, 주말까지 출근해 가며 겨우 겨우 내가 벌인 일을 주어 담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위기를 극복해나가나 싶었더니, 일이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지난번 사고는 그래도 어떻게든 가혹하게 일정을 채찍질한다면 해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 사고는 이미 나의 손을 떠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수습보다는보상과질책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사건이 터지고 나와 소통을 하던 기업의 담당자는 부장, 이사, 사장할 것 없이 불려 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 화는 당연히 나에게로 번지고, 번진 불은 더욱 커져 회사를 태우려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대표는 담당자에게 굽실거려야 했고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온 힘을 다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최선을 다해 내가 초래한 이 상황을 회피하는 선택지였다. 두려워하고, 좌절하며, 불안에 떠는 일이었다. 피할 수 없는 태풍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내가 택한 도피처는 태풍의 눈 정 가운데였다.
생각과는 다르게 상황은 대표의 엄청난 위기관리 능력으로 수습되다 못해, 상태가 사건 전보다 더욱 호전되었다. 태풍은 내가 예상했던 경로를 이탈하며, 말없이 소멸한 듯 보였지만, 나는 여전히 태풍의 눈 속에 움츠려 들어 있었다.
"과거를 분리하지 못해 느끼는 불안감이 만연하다."
분리, 분리,,분리,,,,무엇이 나를 과거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가?
내가 해내야 할 것은 정해졌다. 불안이란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삶에의 의지'를 발현하기 위한 힘은, 역설적이게도 이성에 존재했다. 불안이 아닌 다른 감정은 원래 자리한 불안감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급격하게 번져가는 어두운 불꽃은 차갑고 날렵한 이성만이 잠재울 수 있었다. 과거를 현재와 분리하기 위해서 과거의 어느 시점을 돌이키는 일에 감정이 끼어들면, 더욱 큰 고통이 수반되어 아무런 소득 없이 현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항우울제과 항불안제는, 드디어 비로소 자신들의 순기능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알약 몇 개를 물과 함께 들이킨 지 약 한 시간 후. 머릿속은 어떠한 감정도 남아있지 않고 함부로 범접하는 것도 불가능한 무(無)의 상태. 감정을 약기운이 걷어낸 자리에는 시간이 만든 사실만이 남아있다. 이성의 날카로운 칼날은 내 과거와 현재를 예리하고 단호하게 재단하기 시작했다.이성은 자신이 구분해 낸 과거와 현재 중, 과거의 것들만을 먼저 따로 끄집어낸다. 과거의 모습은 그 색깔이 꽤나 탁하고 단적이었다. 마치 갓 정맥에서 뽑아낸 검붉은 핏물처럼. 그리고 그 안에는 온갖 불순물과 입자들이 분간할 수 없이 뒤섞여 있었다.
이성은 이번엔 매우 정밀하고 섬세한 원심분리기가 되었다. 딱 알맞은 크기의 원심력을 일으켜 핏물에 뒤섞인 입자들과 불순물들을 분리해 내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과 내 주변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 얽혀있는 여러 인물과 사건, 사고들. 감정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아니 보기를 거부했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또렷하고 선명하게 나눠져 정렬되었다.
이제 이성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가 나를 위해서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고, 이 사태의 본질인 과거의 것을 다시 정렬해 놓았다. 이것은 마치 허구 같아 보이는 잔상에서 사실만을 구별해 낸 것과 같았다. 이 사실 속에서 '진실'만을 마주하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나는 우선 정렬된 과거와 따로 놓인 현재를 서로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대조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