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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Sep 30. 2024

1평 짜리 고시원에서 4년을 견디다

대학 4년 간, 나의 잠자리는 1평 조금 넘어 보이는 허름한 고시원 쪽방이었다. 굳이, 정말 굳이 왜 그 비좁고 불편한 곳에서, 남들은 모두 가길 거부하는 그곳에서, 그것도 4년씩이나 살아야 했을까? 사실, 이 선택은 오롯이 나의 굳은 의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나는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교 기숙사는 지방에서 올라온 인원들에게 기숙사 선정 우대점수를 꽤나 많이 쳐주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지원만 한다면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으나, 나는 과감하게 포기했다. 기숙사의 규율과 규칙에 얽매이면서 살아가야 할 서울 살이가 꽤나 텁텁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에게는 기숙사를 신청했으나 떨어졌다고 거짓말했다.  당시 우리 집은 나 혼자 살만한 서울의 원룸 한 채를 구하는 것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삼수를 했고, 동생은 내가 대학교 1학년이던 시절 재수를 하고 있었다. 집안 기둥이 꽤나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뻔한 이 상황에서, 내가 차지하는 지분이 꽤나 컸기에 원룸을 구해달라고 말하는 건 상당히 이기적인 짓이었다. 학비는 당연히 대출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1학년 때는 두 학기 장학생이 되어서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생활비는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렇게 제반 상황이 녹록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값싼 기숙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나의 행동을 누가 생각하더라도 불효라 생각할 수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나는 원치 않았다. 나는 자유로움을 원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한 평 남짓한 곳에서 비좁고 불편하게 사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나는 자유로움을 원했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순전히 내가 번 돈으로 한 달 벌고 한 달을 사는 삶의 최저점에는 고시원이라는 선택지뿐이었다. '00 레지던스', 'XX고시텔, 학생 전용'과 같이 고시원이긴 하지만 나름 시설이 좋은, 다시 말하면 가격이 월에 40만 원 이상인 곳은 당연히 꿈도 못 꿀 일. 나는 학교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에 짐을 풀었다.


 맨 처음 방 계약을 하러 갈 때 어머니가 제주에서 올라오셔서 같이 방을 봐주셨다. 고시원을 알아보겠다고 발품을 팔고 월 25만 원에 거저로 살 수 있겠다는 말을 어머니는 믿지 못하셨다. 서울에서 월 25만 원에 숙식이 가능한 곳이 있다니,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보셔야겠다고 했다. 4층에 위치한 고시원 현관문을 열자마자 땀냄새와 오래된 집 냄새가 섞여 코 끝을 찡하게 자극하는 정체 모를 냄새가 풍겼다. 

 고시원의 복도는 꽤나 어두웠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최소의 조명만이 바닥을 비췄다. 좌우로 나열된 낡고 어두운 나무 문. 벽에 칠해진 도배는 언제 했는지도 모를 만큼 누렇게 변색되어 곰팡이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두운 조명 탓에 허름한 벽이 그다지 어머니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고시원 사장님은 전화로 설명해 준 25만 원짜리 방의 방문을 열어 나와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조심히 재끼고 나서 보이는 것은 암흑 그 자체였다. 사장님이 곧장 벽면의 스위치를 누르니 비실비실 힘을 잃은 조명이 켜졌다. 작디작은 방을 비추기에는 이 힘없는 조명도 나름의 제 역할을 한다는 게 꽤나 씁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몸을 일자로 눕고 두 손을 편히 펼쳐놓으면 딱 양옆 가장자리에 걸칠 만큼 작은 침대, '금성'이라고 적혀있는 오래되고 작은 냉장고, 이제는 결코 생산되지 않을 두 뼘 정도 되는 브라운관 티브이. 그것들이 25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은, 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될 나만의 공간이었다. 



"이 방 말고 다른 방은 없나요?"


어머니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사장님은 30만 원짜리 방이 있다고 했다. 구조에 차이는 없었으나 창문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어머니는 그 방을 보여달라고 했고, 사장님은 바로 맞은편 방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암흑이 그득하던 옆방에 비해서 이 방은 그나마 햇빛이 삐져 들어왔다. 조명을 켜지 않아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일말의 자연광은 머랄까, 5만 원보다는 체감상 값어치가 두어 배에 달하는 느낌이었다. 작디작은 창문 하나뿐이었다. 내 얼굴이 딱 들어갈 만한 창문 그 하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로 그 창문 쪼가리 하나로 만들어진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아들, 이 방으로 하자."


 미소도, 미안함도, 슬픔도,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머니의 무덤덤한 표정.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삶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아들이 마주할 앞으로의 것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 듯한 이 공간을 마주하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당시 나는 결코 어머니의 무거움을 개의치 않아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시원에 정착한 내 삶이 꽤나 자유롭고 편하다는 것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기쁨이 차올랐다. 비좁을 줄 알았던 침대는 내가 학교를 마치고 노곤한 몸을 뉘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술에 취해 나자빠지려 하는 내 몸을 침대에 의지하면, 침대는 특유의 낡고 녹슨 스프링 소리를 삐걱거리며 내 고달픔을 받쳐내어 주었다. 후덥지근한 여름의 열기가 자그마한 방을 데우느라 매 여름마다 피로에 절어 아침을 맞이할 때도, 한 겨울 낯선 서울의 매서운 추위가 작디작은 창문을 뚫고 서늘한 한기를 방에 뿜어대더라도, 자유롭게 서울 도심을 배회하며 다양한 모습을 나 홀로 감상하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비록 내 입맛에 딱 맞는 어머니의 반찬과 요리 대신에, 질퍽한 진밥과 중국 어느 공장에서 생산해 낸 김치가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음식 전부였지만, 그래서일까, 가끔씩 올라오셔서 반찬을 싸주시는 어머니의 음식이 더욱더 애잔해질 수 있었다. 

 내가 지내는 곳의 모든 조건과 환경은 내가 살아온 그 어느 환경보다도 비좁고, 초라하고, 어둡고, 외로웠지만, 단 하나 자유로운 내 의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 주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 4년간 고시원의 생활을 마치고, 나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 35만 원인 허름한 원룸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다니던 학원 원장님이 내 사정을 알고 보증금을 대주셨다. 큰 이사박스 하나에 짐을 넣어도 꽤나 빈 공간이 여유로울 만큼의 짐. 그 짐들이 지난 4년 간 나의 서울 생활을 함께했던 존재들이었다. 짐의 부피는 내가 지내온 고시원만큼이나 작았고, 내 땀과 체취가 맺히기 이전부터 그 방을 거쳐온 여러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이 짐 속에 함께 뒤섞여 있는 듯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고시원 방 크기보다 2~3배 더 큰 방 두 개와, 거실이 따로 있는 전세 집에서 살고 있다. 집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내 짐은 늘어나고, 내 씀씀이도 커졌으며, 그에 따라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도 점차 늘어갔다. 나를 비추던 조명은 그때 그 시절보다 훨씬 세차게 공간을 들이친다. 매퀘한 땀내가 나던 복도는 이제는 없다. 이름 모를 낯선 이들이 각자의 고단함을 품고 대충 허기를 때우려 모여드는 공동주방 대신, 내가 온전히 나의 밥그릇을 채우는 나만의 주방이 있다. 5만 원이라는 값어치 이상을 해준 작디작은 창문 대신 벽면 한 칸을 통째로 채워, 낮에는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온 세상이 훤히 들이치는 창문이 내 앞에 떡하니 있다.

 

 서울을 마주할수록 늘어나는 내 공간의 크기와 살림살이만큼 나의 자유로움은 점차 줄어들어 간다. 이제 비로소 부모님의 조력 없이 나 홀로 이 서울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유를 향한 내 의지는 십여 년 전보다 훨씬 연약해져 있다.  

 

 창문의 크기가 커진다고 해서 내가 자유로움을 담을 수 있는 의지 또한 더 커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둠만이 홀로 잠든 나를 감싸고, 심연이 벽면에 번진 곰팡이처럼 포자를 흩뿌려대지만, 월 5만 원이라는 돈으로 작디작은 창문 하나가 세상을 비추는 값어치의 전부였던 그 시절. 5만 원은 내가 자유롭게 방황하고 배회할 수 있도록 창문에게 지불한 서울 자유이용권의 품삯이었다.


 내가 택한 1평 남짓한 허름하고 비루한 고시원은 결코 나에게 똥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 더욱 큰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해준 곳이었다. 오히려 잘 썩은 된장이었다. 내가 이후 살아가야할 서울에 썩혀갈 있게 미리 나를 폭삭 익혀준 곳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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