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약을 먹게 된 직접적 사태, 내가 벌인 사고를 방치하던 날, 나는 무기력에 잠식당하고 밤잠을 설쳤다.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가장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대표가 아니었다. 대표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하면서 나의 잘못까지도 함께 보고하는 일은 우군에게 상황을 알리는 일이었다. 과정은 괴로워도 결국엔 같은 편에 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절대 그렇지 않다.
작금의 상황에서 나만큼이나 곤란했던 것은 나와 소통했던 업체의 담당자였다. 나와 직접적으로 소통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행사 주최 측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대행사의 팀장이었다. 팀장은 우리측에 교육 자료와 강연자를 요청했다. 회사는 교육 서비스를 운영했고 행사에 맞는 강사 풀을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강사 중에서 행사에 적합한 사람을 뽑고 행사의 취지에 맞는 교육 자료 준비를 요청했다. 강사 섭외부터 준비, 그리고 일정 체크까지 모든 일이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고가 터진 후 뒤늦게 깨달았지만, 나는 그저 섭외 이후의 프로세스를 그저 강사에게 떠맡기기만 했을 뿐, 어떠한 중간 체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대행사 팀장에게 모든 일은 일사천리대로, 순리대로, 매우 잘 되어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내가 약속했던 모든 상황이 180도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제일 먼저 파악한 것은 그였다. 강사는 행사의 취지에 맞지 않는 교육을 준비했다. 내가 수습하기에는 이미 현장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냉소했다. 행사가 끝나고 대행사의 팀장은 주최 측에 불려 가 조리돌림을 당했다. 사장부터 상무, 전무, 그리고 부장급까지 모두를 찾아가 사죄하며 굽신거려야 했다. 당연히 그 화살은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팀장은 사건 당일 밤 나에게 온갖 불만을 쏟아냈다. 평소 소통 시에는 너무도 온화하고 차분하던 그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의 태도가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그의 말투와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절대 뜨겁지 않았다. 그는 마치 너무도 차디찬 빙하의 중심부에 그의 화를 억지로 가둬두었다. 열기보다도 더 강렬한 냉기로 나를 몰아붙였다.
'죄송합니다.'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이라곤 이 다섯 글자뿐이었다. 이미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수습은 대표의 몫이었다. 대표가 직접 팀장과 얘기를 나눠야 했지만, 일단 자신이 수습안을 정리할 동안만 나에게 계속 팀장을 달래달라고 했다. 누가 누굴 달래나. 나 자신도 제대로 달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보다 더 격한 분노와 수치에 휩싸인 누군가를 어떻게 달래야 한단 말인가.
나의 사과에도 팀장의 냉기는 데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냉담하고 냉소적인 감정조차도 얼어버려서 이젠 사람과의 대화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미 그에게는 나와 그동안 즐겁게 나누었던 과거는 오물 묻은 휴지 조각만도 못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죄송하다는 말과 대표가 일을 수습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달려달라는 말뿐이었다. 그는 내 앞에 있지 않았지만 나는 내 전화기가 마치 그의 분신인 것처럼 두 손으로 떠받혔다. 허리를 자연스럽게 피고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 90도에 가깝게 허리를 연신 굽혔다 폈다 반복하면서 굽신거렸다. 그가 당해온 수치와 모욕을 온전히 내가 이어받고 있었다.
전화가 끝나고 나는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일의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내가 회사에 오는 손실을 전부 감당하겠다고 했다. 내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 손실액을 순수하게 돈으로 보상해 내려면 몇 달 치 월급으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나약한 위선자의 표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을 제대로 수습하려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습은 모조리 대표에게 떠맡기고,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미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 목숨을 부지하려고 생각해 낸 악수였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벅찼다. 판단력은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다. 대표와의 통화가 끝난 후, 전화기의 열기를 채 식히지 못한채 곧바로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연신 울려대는 전화기 진동이 나에게는 전기충격보다도 기분나쁘게 저릿했다. 손에서 전화기를 떨구고 한참을 바라봤다. 가슴이 요동치다 못해 심장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손발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는 정말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를 것만 같았다.
이상했다. 나는 분명 팀장의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그동안 벌려 온 과오에 대한 회상과 그로 인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래, 그때의 기억이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실루엣은 점차 선명해지더니 약 7년 전, 악몽 같았던 그날 저녁 사무실의 모습으로 뚜렷해져갔다.
불쾌한 전화벨 소리, 묵직한 수화기의 무게, 그 안에서 들려오는 고막을 날카롭게 뚫는 소리.
모든 일은 그때부터로 돌아가야 이 얽혀진 실타래를 풀 수가 있었다.